컨텐츠 바로가기

07.01 (월)

여기도 저기도 빵집 명인, 훈장인가 마케팅인가 [視리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혁기 기자]

# 여기 한 빵집이 있습니다. 입구에 걸려 있는 '대한민국 명장'이란 간판이 눈에 띕니다. 태극마크에 대통령 이름까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가 인정한 맛집'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 그런데, 이와 비슷한 명패가 걸려 있는 빵집은 수두룩합니다. '제과제빵 명인' '대한민국 명인' 'OOO 외식협회 명인' 등 명칭도 찬란합니다. 하나같이 화려한 명패에 훈장, 수료증을 내걸고 있으니 소비자 입장에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 빵집 사장님 모두가 제빵의 명장들일까요? 더스쿠프가 이들 틈바구니로 펜을 집어넣었습니다. 더스쿠프 視리즈 '빵집 명인 비틀어진 열전' 1편입니다.

더스쿠프

최근 태극기와 함께 명인·국가대표 등을 내건 빵집이 눈에 띄게 늘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평소 빵을 좋아해 빵집 투어를 자주 다니는 A씨. 얼마 전, 종종 가던 동네 빵집이 새롭게 리모델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빵집 외관에는 예전에 못 보던 간판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엔 태극 마크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제과제빵 명인'.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내부에도 메달, 태극기가 붙어 있는 수여증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A씨는 이 빵집이 맛이 뛰어나 정부로부터 상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기대감에 부풀어 빵을 이것저것 담아 계산했습니다.

가게를 나온 A씨는 곧바로 빵 하나를 집어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맛은 크게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A씨는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명인 소리를 들을 만큼 맛있지는 않은데, 이게 정부가 표창까지 할 정도인가?"

최근 들어 한국인의 '빵 사랑'이 극진해진 듯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 '성심당'을 촬영한 영상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영상 속 가게 내부는 성심당 빵을 사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온 소비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대전 관광객의 80%는 성심당 빵을 사러 오는 거다'란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맛있는 빵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단 얘기겠죠.

실제로도 한국인의 빵 소비량은 매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한국인 1인당 하루 빵 섭취량은 2012년 18.2g에서 2021년 19.8g으로 6.6%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연간 쌀 소비량이 69.8㎏에서 56.9㎏으로 18.4%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이 때문인지 관련 시장도 매년 성장세입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양산빵 시장 규모는 2019년 9756억원에서 2022년 1조2113억원으로 24.1% 증가했습니다. 유로모니터는 지난해 12월 보고서에서 2023년 시장 규모도 전년 대비 8.3% 늘어난 1조3125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더스쿠프

[자료 | 통계청,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더스쿠프 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빵 수요가 늘어난 만큼 소비자를 붙잡으려는 빵집들의 경쟁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들어 '명인'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빵집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언급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들 빵집은 화려한 수료증과 '국가대표 명인' '대한민국 명인' 등의 글자가 적힌 간판 등을 전면에 내걸고 가게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뚜레쥬르(CJ푸드빌)나 파리바게뜨(SPC) 등 잘나가는 대기업 브랜드에는 없는 차별화 포인트를 줄 수 있으니, 중소 빵집이 펼치기엔 꽤 괜찮은 마케팅 전략입니다.

'국가대표' '대한민국' 등의 단어 때문인지 언뜻 보면 정부가 수여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제과·제빵 직종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은 대한민국명장, 제과 기능장, 제과·제빵 기능사 등 3개뿐입니다.

그중 제과 기능장과 제과·제빵 기능사는 시험을 쳐서 얻는 일종의 자격증입니다. 기능사는 별도의 응시 자격이 없고, 제과 기능장은 기능사 취득 후 7년 이상 실무에 종사하면 응시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명장은 국가가 인정한 '명예직'입니다. 이는 숙련기술장려법 제11조 규정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37개 분야 97개 직종에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를 선정하는 제도입니다. 명장으로 선정되면 대통령 명의의 증서와 휘장, 명패가 주어집니다. 또 일시장려금 2000만원과 은퇴 시까지 매년 215만~405만원에 달하는 종사장려금도 받습니다.

혜택이 큰 만큼 선정 조건도 까다롭습니다. 숙련기술이 뛰어나야 하는 건 물론이고 해당 분야에 15년 이상 종사하고, 숙련기술 발전을 위한 성과가 우수해야 하고, 숙련기술자 지위 향상을 위한 성과가 우수해야 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엄격한 심사를 진행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심사를 진행하지만 명장이 배출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제과·제빵부문에서 명장 자격을 얻은 사람은 2000년 1호 명장인 박찬회 명장(가게명 '박찬회 화과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총 16명뿐입니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명장'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빵집은 한국에 16곳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명장 한명이 여러 빵집 브랜드를 차리는 경우까지 따져도 30곳을 넘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많은 '명인 빵집'의 타이틀은 누가 달아준 걸까요. 맞습니다. 눈치챘겠지만 대부분 민간단체가 발급해준 인증에 불과합니다.

더스쿠프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더스쿠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문제➊ 주먹구구 선정 기준 = 혹자는 "정부에서 수여했든 민간단체가 발급했든 실력이 있는 빵집을 선정했다면 문제 될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민간단체가 정부 못지않은 심사 기준을 적용해 '빵집'을 뽑았다면 아무런 문제도 아닐 겁니다. 그럼 실제로 그랬을까요? 이를 확인하기 위해 한 민간단체의 홈페이지를 살펴봤습니다. 이 단체는 지금까지 총 35명의 제과·제빵 명인을 배출했습니다.

이 단체의 명인 선정 기준은 이렇습니다. 각 분야에 15년 이상 종사한 자, 명인이나 명장으로부터 과정 이수를 받은 후 10년 이상 종사한 자, 기타 사회 덕망 있는 분들의 추천을 받은 자 등입니다. 15년 이상 종사해야 한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덕망 있는 분들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선정 기준으로 타당한지는 의문입니다.

이번엔 또다른 민간단체의 선정 기준을 보겠습니다. 대한민족(국적보다 민족의 개념을 우선함), 덕과 인품을 갖춘 사람,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는 사람,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그 분야의 지도자로서 거듭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 등입니다. 언뜻 봐도 모호합니다.

다시 처음 단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명인으로 선정된 35명은 모두 단체 소속 회원이었습니다. 후보자를 심사하는 선정심의위원 4명도 단체의 회장·운영위원장 등입니다. 후보자도 심사위원도 모두 회원이니 선정 과정이 투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문제➋ 유료 명인 = 게다가 이같은 명인 타이틀은 '공짜'가 아닙니다. 명인에 등극하려면 해당 민간단체에 가입하거나 단체에서 운영하는 커리큘럼을 수료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 액수도 적지 않습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맞춤 컨설팅을 수료하면 명인 타이틀을 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단법인도 있다"면서 "평균 수백만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호칭을 얻는다"고 귀띔했습니다.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단체에 가입하려면 연회비를 내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명인 자격을 돈 받고 팔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고 말했습니다만,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돈을 주고 호칭을 판다'는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긴 힘듭니다.

더스쿠프

일반 소비자가 명장·명인의 차이점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평범한 소비자가 이런 호칭의 옥석을 가려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란 점입니다. 민간단체가 지급한 명패엔 태극기가 그려져 있거나 대통령실을 연상케 하는 봉황으로 장식해놓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국가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호칭을 부여한 것으로 혼동할 여지가 큽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법적 테두리가 있긴 합니다만, 무분별한 호칭 사용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데다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스템을 정비하지 않는다면 소비자로선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될지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빵집 명인 비틀어진 열전' 2편에서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저작권자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