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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기적과 명상을 피워내는 식물 키우기[안드레스 솔라노 한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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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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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 나는 식물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 계절이 없어 1년 내내 어딜 가도 푸른 식물을 볼 수 있던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동네 꽃집이나 주변 시장에서 조금씩 화분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심지어 화훼시장에도 몇 번 들러 화분을 샀다. 7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각 식물이 가진 성향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고 돌보는 방법도 알게 됐다. 얼마 전엔 집에 들인 식물을 세어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더 들이고 싶은데 벌써 화분만 25개다. 이 중에는 제주도에서 태어난 레몬 나무도 있다. 아름답게 맺은 레몬 열매를 수확해서 잘라 유리 용기에 넣은 뒤 소금을 듬뿍 넣으면 서서히 레몬즙이 나온다. 모로코식 레몬 절임이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소금에 절인 레몬 껍질이 부드러워지고 향은 강해져 구운 닭고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우리 집은 3층인데 1층에 사는 이웃 어르신에게 식물은 더욱 큰 삶의 낙인 듯하다. 8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은 언제부터 그랬는지 공동 구역인 건물의 진입로와 인근을 자신만의 정원으로 만들어 가꾸고 있다. 감히 불만을 제기하는 이웃은 없을 거라고 믿는데, 건물 앞을 지나가는 모든 낯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랄 정도로 잘 가꿔져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크기와 종, 모양의 식물이 가득하지만, 정신없이 늘어져 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지 않다. 돌보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통제해야 한다는 집착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식물을 보고 있으면 계절과 온도와 습도에 따라 자라도록 자유롭고 섬세하게 가꾸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집에서 나가거나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이 멋진 정원을 함께 누린다는 사실에 1층의 이웃에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가 가꾸고 있지만 ‘우리’의 정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년 전 이 건물로 이사 온 이유 중 하나가 이 정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식물 얘기를 하다 보니 얼마 전 콜롬비아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고등학교 동창이 생각난다. 학창 시절에는 꽤 친하게 지냈는데 졸업 후에는 다시 보지 못했다. 올 초 콜롬비아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그와 연락이 되었고 20여 년 만에 다시 그를 만났다. 어느 일요일 그가 나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 바로 건너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의 커다란 창문 너머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매일 아침 우리가 등교하던 문이 정면으로 보였다. 나라면 절대로 살지 않았을 집이었다. 이윽고 나는 그가 매일매일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집에서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아파트 내의 엄청난 양의 식물과 화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가 직접 말해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수년간 심리치료를 받았는데 결국엔 식물을 관리하는 것이 온전한 명상의 형태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한편, 식물에 진심인 사람들의 집에는 꽃이 피는 식물은 많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동창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식물은 단순 장식 이상이다. 나도 이제야 막 식물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지만, 꽃이 피는 관엽식물은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꽃나무를 고르라면 벚나무보다는 목련을 선택할 것이다. 몇 주 전 종로5가 꽃시장에서 어떤 남자가 목련 나무를 구매해 들고 가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나무를 심을 남자의 정원과 10년, 15년 후에 크게 자란 나무에 풍성하게 핀 목련을 상상했다. 그러니까 그 나무를 지금 산다는 건 미래에 대한 신뢰의 행위다.

우리 집 발코니에는 콜롬비아를 떠올리게 하는 열대 식물인 작은 구아버 나무와 타마린드 나무가 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이 나무들을 실내로 들여야 하며, 그 시기에 나무들은 앙상하다. 처음 잎이 다 떨어진 걸 봤을 때 나는 곧 화분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마음이다. 이제 나는, 비록 계절 나무는 아니지만 이 나무들이 매년 겨울잠을 자고 봄이 되면 슬슬 돌아와 여름에 마치 콜롬비아 계곡에서 푸른 잎을 활짝 펼친 식물들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걸 알고 있다. 생명의 은밀한 기적. 이것이 바로 식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 아닐까. 타마린드 나무를 잘 키워서 번식시켜 작은 나무가 하나 더 생기면 1층에 사는 이웃에게 선물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누리는 기쁨을 그 어르신과 함께 나누게 되길 바란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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