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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씨름장에서 30년, 아나운서 임형숙 “성공한 선수들은 3박자를 갖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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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국 씨름장에서 30년

장내 아나운서 임형숙씨

최성민 선수가 이변을 만들 것인가, 김민재 선수가 마무리를 지을 것인가! 두 선수에게 큰 박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13일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 백두장사 결정전. 김민재(영암군민속씨름단)와 최성민(태안군청)이 결승에서 맞붙었다. 덧걸이로 기선을 제압한 김민재는 들배지기를 성공시키며 단숨에 2대0을 만들었지만, 세 번째 판에서 최성민의 차돌리기에 반격당했다. 씨름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장내 아나운서의 코멘트에 따라 박수와 환호로 두 선수를 응원했다.

네 번째 판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가 울렸다. 김민재가 최성민의 왼쪽 무릎을 오른쪽 다리로 감아 넘어뜨렸다. 씨름판에 두 거구가 엎어지자 모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기쁨의 환호와 안타까움의 탄성이 경기장을 채웠다. “왼덧걸이! 김민재 선수가 왼덧걸이를 성공시켰습니다! 김민재 선수가 3년 연속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 백두장사를 차지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씨름장 밖에서 임형숙(52)씨를 만났다. 국내 유일의 씨름 장내 아나운서. “관중도 지친 선수들을 보면 응원해주고픈 마음이 생기죠. 그럴 때 제가 박수를 유도해요. 관중이 저의 코멘트에 지휘 따르듯 하나로 움직일 때, 그래서 선수들이 에너지를 받아 경기를 잘해낼 때, 그 희열은 말도 못 합니다.”

조선일보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임형숙 장내 아나운서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선수들이 어릴 때부터 저를 봐와서 ‘누나’라고 친근하게 불러요. 요즘은 ‘이모’ 소리도 들어요."/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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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카랑 귀에 꽂히는 목소리

-올해로 꼭 30년째라고요? 장내 아나운서가 첫 직업인가요.

“1995년에 시작했어요. 시작은 교통방송 리포터였어요.”

-씨름판 아나운서로 변신한 계기라면?

“발음 연습을 하러 KBS 아카데미를 다녔어요. 스포츠 방송 캐스터로 활동하던 이규항 전 KBS 아나운서가 스승이셨어요. ‘너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게 장내 아나운서로 맞겠는데’ 하시더라고요. 마침 대한씨름협회에서 장내 아나운서를 찾고 있어, 저를 추천하셨어요.”

-스포츠 경기장에 적합한 목소리가 따로 있나요?

“제 목소리가 귀에 꽂혀요. 방송국에서 선호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당시 아나운서나 리포터는 가늘고 고운 목소리, 아니면 차라리 중저음 목소리를 선호했어요. 저는 음폭도 큰 것 같아요.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요.”

-그전까지는 씨름장에 아나운서가 없었나요?

“협회 소속 직원으로 사무도 보면서 장내 중계도 하는 분은 계셨지만, 전문 아나운서는 없었어요. 씨름협회가 씨름 부흥을 애쓰면서, 경기 진행 전문화를 목표로 아나운서를 공채했어요. 서너명 지원했는데, 제가 뽑힌 건 KBS 스포츠 캐스터가 추천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보이는 모습만 설명한다’가 해설 원칙이라고요.

“잘했다, 못했다 하는 평가는 선수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여요. 승패 결론만 말씀 드리죠. ‘이쪽 선수가 뭐 하려 했는데, 저쪽 선수가 그걸 막고 뭘 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을 설명해요.”

-’관중이 듣기 편하게 씨름 기술을 풀어 해설한다’도 있는데.

“경기 중간 화장실 가다 만난 관중이 제 해설을 듣고 몰랐던 부분을 알게 돼 씨름이 더 재미있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좋아하는 선수와 싫어하는 선수에 따라 중계가 달라지나요?

“의도하지 않지만 목소리에 힘이 더 실리는 선수가 있나 봐요. 한 선수 부모님이 ‘우리 아이 이름을 힘 있게 불러줘서 감사하다’고 해서 알았어요.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되는 선수들이 있나 봅니다.”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요.

“한 대학부 선수를 인터뷰하는데 ‘선생님, 저 칭찬해준 거 기억나세요? 6학년 때 맨날 져서 한 번만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이길 때 썼던 기술을 언급하면서 칭찬해줬어요. 그게 씨름을 계속하는 원동력이 됐어요’라는 거예요.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30년간 중계한 씨름 선수가 몇 명이나 되나요.

“1000명쯤요.”

-잘될 줄은 몰랐는데 성공한 선수가 있다면.

“없었어요. 엘리트 선수들은 실력 차이가 크지 않아요.”

-성공한 선수들은 공통점이 있나요.

“독기가 강해요. 승부욕이 센 거죠. 하지만 이건 잠깐이고, 정상을 지키는 선수들은 자기관리가 철저해요. 요즘은 방송 등에서 손을 뻗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선수가 오래가요. 자기관리에는 인성도 포함됩니다. 성공하는 데 인성이 결정적이진 않지만, 성공한 뒤에 인성이 좋지 않으면 구설에 오를 수 있고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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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강릉단오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140kg 이하)에 등극한 김민재(영암군민속씨름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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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추석은 시댁 아닌 씨름장에서

홈페이지를 보니, 올해 개최 예정인 씨름대회는 26개. 강원도 강릉·춘천·평창, 충북 제천·괴산, 전남 보성·강진, 경북 문경 등 전국에서 열린다. 임 아나운서는 모든 대회에서 장내 중계를 한다. 일 년의 절반 정도를 씨름장에서 보낸다고 했다.

-씨름 대회는 대개 명절에 열리죠?

“설·추석 그리고 단오에는 빠지지 않지요. 명절 전후로 보통 일주일 열려요. 설과 추석 연휴를 꼬박 씨름장에서 보내죠.”

-실례지만 결혼하셨나요?

“그럼요. 아들과 딸이 있어요.”

-명절에 시댁에 못 가겠네요?

“내놨죠(웃음).”

-명절 증후군은 없겠어요.

“그렇죠. 서울 근교나 경기도에서 대회가 열리면 새벽에 시댁 가서 일하고 씨름장으로 출근해요. 시댁이 서울이라. 저는 명절에 씨름 대회가 지방에서 열리는 게 좋아요(웃음). 아예 안 가지는 않고, 명절 지나고 가지요. 친척 어른들이 북적거리지 않고 시아버지·시어머니만 계셔서 훨씬 나아요.”

-시부모님이나 남편이 불만은 없나요?

“있겠지만 어쩌겠어요? 결혼 전부터 이 일을 했는데.”

-자녀들이 어릴 때는 데리고 다녔다고요.

“아이들이 특히 명절에는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했어요. 선수들이 애들과 잘 놀아줬고요. 이제 다 커서 아들은 얼마 전 제대했고 딸은 대학 3학년이 됐네요.”

-선수들도 자식 같겠어요.

“초등·중학교 때부터 실업 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부모님들과도 인사하는 사이죠. 선수들을 함께 키우는 느낌이 들어요.”

-선수들이 ‘누나’라고 부른다면서요?

“이제 씨름단 감독이 된 선수도, 그 감독 밑에 까마득하게 어린 선수들도요. 감독님들이 ‘이게 무슨 족보입니까? 호적이 다 꼬였다’며 웃어요. 요즘은 ‘이모’라 부르는 선수들도 있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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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숙 씨름 장내아나운서가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모래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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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팬덤 치솟은 여자 씨름

강릉단오제 씨름 경기장은 관중으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중장년이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젊은층, 여성이 많았다. 그들은 여자 씨름 선수들에게 특히 환호했다. 망원렌즈가 달린 커다란 카메라로 선수들을 찍기도 했다.

-여자 씨름이 남자 씨름보다 인기인가요?

“남자 씨름이 전체적으로 더 인기가 높아요. 하지만 최근 팬덤이 형성된 건 여자 씨름이에요. 안산시청 김은별 선수가 서바이벌 프로에 나와 활약하면서 파급 효과를 일으켰죠.”

김은별은 지난해 5월 공개된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에 출연했다. 운동선수·경찰관·경호원·군인·소방관·스턴트맨 24명이 직업별로 4명씩 6팀을 이뤄 서바이벌 게임을 펼치는 예능. 김은별이 포함된 운동선수팀이 우승을 거머쥐었고,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에게 팬카페와 팬클럽까지 생겼다. 전국 씨름대회를 찾아 다니며 여자 씨름 인기 몰이에 기여하고 있다.

-남자 씨름 선수들은 백두급보다 태백·금강급이 여성들에게 인기 높다면서요.

“근육질 몸짱에 잘생긴 얼짱 선수들이 덩치 큰 백두급(140㎏ 이하)·한라급(105㎏ 이하)보다 낮은 체급인 금강급(90㎏ 이하)·태백급(80㎏ 이하)에 주로 있어요. 백두급은 씨름 자체를 사랑하는 팬이 많고요.”

-여자 선수들도 예뻐야 인기인가요?

“팬들은 90%가 여성이에요. 모래판에서는 힘과 기술을 보여주지만, 내려오면 내성적인 선수들이 인기가 있어요. 경기장 안팎 다른 모습에서 매력을 느끼나 봐요.”

-중계석에서 보기에 관중석이 젊어졌나요?

“젊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장년이 대부분이죠. 씨름 시합은 주중이 많은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직장 나가 일하잖아요. 주말 외에는 휴가를 내고 와야 하니 쉽지 않지요. 특히 여자 씨름 팬들은 ‘휴가 내기 힘드니 제발 주말에 경기해달라’ 하소연하기도 해요.”

-여자 씨름 경기를 주말에 열면 안 되나요?

“씨름 대회는 보통 일주일인데, 여자 씨름이 주중에, 남자 씨름이 주말에 배정됩니다. 아직은 남자 씨름이 메인이니까요. 상금도 훨씬 더 많고요.”

-30년 동안 지켜본 씨름의 매력이라면.

“승부가 금세 나고, 이해하기 쉬워요. 모르고 봐도 직관적으로 재밌죠.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신사적인 스포츠란 점도 매력입니다.”

-씨름을 직접 해본 적 있나요?

“40대에 배워봤어요. 몸과 몸을 맞댄 상태에서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과 어떤 작전을 펼치려는지가 느껴져 짜릿하더라고요. 씨름은 두뇌 플레이가 뛰어난 선수들이 힘 안 들이고 이겨요.”

-현장에서 보니 긴장감과 박진감이 엄청난데요.

“방송으로는 반도 못 전해요. 씨름장에 오셔서 직접 느껴보시라고 꼭 말씀 드리고 싶어요.”

[강릉=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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