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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정동칼럼]국가비상사태는 언제 끝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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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다행이다. 그동안 시장에 맡겨놓기만 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될 것처럼 하던 정부가 뭐라도 하려고 해서 다행이다. ‘그동안의 저출생 정책을 냉정하게 재평가하고 해외의 성공, 실패 사례까지 철저하게 조사했다’고도 했다. 좋은 자세다.

그런데 막상 발표된 내용은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 정부는 ‘일·가정 양립, 양육, 주거’가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한 3대 핵심 분야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쉬게 하거나, 돈을 주거나, 아이 돌봄을 강화하거나, 집을 주고, 세금을 깎아준다’는 것이다. 틀렸다. 일과 가정의 양립 이전에 가정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이 문제다. 왜 가정에 대한 욕구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양극화라는 경제적 요인, 초경쟁사회라는 사회적 요인, 세대와 젠더 갈등 같은 문화적 요인 등 이미 많은 논의가 존재한다. 이에 대한 대책 없는 3대 핵심분야 대응은 시행착오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일·가정 양립의 목표를 ‘현재 6.8%인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을 임기 내 50%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식으로 잡아놓은 걸 보면, 정책 실현 의지도 별로 없어 보인다. 되면 좋겠다. 그러나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우리나라 공공부문 일자리는 전체 취업자 수의 10% 정도다. 어느 정도의 현실적 목표와 실현할 방법이 제시되어야 고개를 끄덕일 텐데, 이건 그냥 주먹이나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통령도 모르는 것 같지 않다. ‘저출생 문제는 수도권 집중, 높은 불안과 경쟁 압력 등 사회 구조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3대 핵심 분야에만 집중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난제’라고 했다. 덧붙인 말도 있다. ‘지역균형발전정책과 고용, 연금, 교육, 의료 개혁을 포함한 구조개혁도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행정부가 ‘~도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는 말의 의미는 항상 똑같다고 보면 된다. 새로운 것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 정부에서 하는 일들이 다 저출생에도 도움이 되는 사업들이라고 간주하시면 된다는 뜻이다. 결국 그동안 저출생에 대응하던 방식과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정부의 말은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다. ‘이렇게 하면 해결이 안 되겠지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어색하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 이런 경우 3가지 원인이 있다. 알지 못하거나, 알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알면서도 안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왜 청년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가이다. 알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대응이다. 알면서도 할 생각이 없는 것은 성평등이다.

정부가 기본적인 일들을 잘하는 것은 사실 저출생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 아이를 낳고 길러서 군대에 보내면, 국가가 그 군인을 제대로 대우하리라는 믿음 정도는 있어야 한다. 청년들이 주말에 축제를 즐기러 나왔다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떼죽음을 당할 일은 없다는 정도의 신뢰는 있어야 한다. 국가가 관리하고 보증하는 부동산임대 제도에서 터무니없는 사기를 당하고도 대책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가정을 꾸리겠는가. 하루에 6명이 일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나라, 하루에 36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일상의 행복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나. 보통의 힘 없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돈이 없고 법을 몰라 하소연할 곳이 없는데, 권력을 갖고 법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남용할 직권이 원래 없다는 식으로 빠져나가는 사회에서 내 아이에게 정의를 가르칠 수는 없다.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국가와 기업이 안전을 내팽개친 결과 꿈 많은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결코,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대통령은 양육과 주거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채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빨리 밝혀내고,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게 키운 아이가 누구의 책임으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양육을 지원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내가 번 돈을 아끼고 저축해서 마련한 가정의 보금자리를 통째로 잃어버렸는데, 아이를 낳으면 주거를 지원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인가.

오래전 한 드라마에서 아이를 잃고 남편과 헤어진 딸에게 아버지가 말한다. “은호야, 니가 행복해져야 이 세상도 행복해진다. 행복해져라, 은호야.” 행복해야, 세상에 희망을 품는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열심히 정직하게 살면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세상을 살아간다. 정치가 지금 이 땅의 청년과 여성들의 행복을 말할 때, 국가비상사태는 비로소 끝이 날 것이다.

경향신문

이관후 정치학자


이관후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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