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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빵 280개 주문 ‘노쇼’ 진실은?… 주인도 손님도 “억울” [서아람의 변호사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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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만원어치 예약 후 연락두절

고소당하자 맘카페에 “억울” 글

고의 땐 사기죄 아닌 업무방해

이유 불문하고 사과 먼저 했어야

오늘 사회면 메인 기사 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빵 280개.’ 뭐지? 동네 빵집에서 빵 280개, 판매가로는 123만8000원어치의 빵을 주문한 손님이 노쇼했다가 고소당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음식점이나 빵집에서 대량의 선주문을 받으면 예약금이나 선금을 걸어두기 마련인데, 안타깝게도 주문을 받은 사람이 아르바이트생이라 그런지 따로 예약금을 요구하거나 걸어두진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빵집 사장님은 280개의 빵을 고스란히 재고로 떠안게 되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정작 손님은 자신이 더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중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세계일보

사진=gettyimagesbank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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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발단은 약 2주 전, 맘카페에 올라온 한 게시물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의 엄마가 이 글의 주인공인데요, 이분을 편의상 ‘쉬폰’씨라고 하겠습니다. 쉬폰씨는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빵을 돌리려고 빵집 사장님에게 단체 주문이 되냐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이틀 후 다시 빵집에 들러 종업원에게 사장님과 단체 주문 얘기를 했다고 언급하고 휴대폰 번호와 원하는 빵의 종류, 수량을 말했고요. 다만 주문 확정을 한 건 아니었고, 확정하게 되면 다음 날 전화를 하고 계좌로 대금을 입금하겠다고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이지요. 공교롭게도 쉬폰씨는 그날 화상을 입고 다쳐서 빵 주문을 안 하고 넘어가기로 했는데, 일주일 후 빵집에 갔더니 사장이 전화를 왜 안 받냐고 화를 내면서 경찰에 고소했으니 조사받으러 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전화번호를 잘못 적은 건 종업원이고, 확정도 안 된 주문을 갖고 사장이 맘대로 빵을 만든 것인데 자기가 왜 고소당해야 하느냐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해당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자, 빵집 주인은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건 빵집이나 쉬폰씨의 실수가 아니라, 쉬폰씨가 고의로 가게를 골탕 먹인 행위라는 겁니다. 빵집 종업원의 기억에 따르면, 쉬폰씨는 그날 주문을 확정했을 뿐 아니라, 픽업하는 날 대금을 치르겠다고 약속하고, 심지어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주문된 게 맞는지 확인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수상한 부분이 이것인데요. 종업원이 적은 쉬폰씨의 번호와, 쉬폰씨의 실제 번호가 7자리가 달랐다고 합니다. 010을 빼면 사실상 딱 하나 빼고 전부 전혀 다른 번호였던 것이죠. 만일 쉬폰씨의 주장대로 종업원이 번호를 잘못 받아 적은 것이라면, 많아도 두세 자리가 다르고 나머지는 같아야 상식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빵집 주인은 원래 그냥 넘어가려고 했으나, 인터넷에 글을 올려 자신을 비난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해 결국 형사 고소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빵집 주인이 쉬폰씨를 뭘로 고소했는지까지는 방송에 자세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사 댓글을 보면 쉬폰씨를 ‘사기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 자주 보이는데요. 만일 쉬폰씨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범죄로서의 사기에 해당하진 않습니다. 우리나라 형법에서는 사기를 ‘다른 사람을 기망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쉬폰씨가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거짓말하고 빵을 외상으로 받아서 튀었다면 그건 사기가 되겠지만, 고의적으로 노쇼하는 건 일단 사기가 아닙니다. 대신 ‘업무방해’에 해당할 수는 있습니다. 업무방해는 ‘위계’나 ‘위력’으로 회사나 사람의 영업을 방해할 때 성립합니다. 여기서 ‘위계’는 속임수, 즉 거짓말, 그리고 ‘위력’은 물리력의 행사를 의미합니다. 가령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마사지업소를 불법 퇴폐업소라고 거짓 민원을 반복적으로 넣어 구청의 조사를 받게 만들었다면 이는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만취해 노래방 한복판에 앉아 우리 마누라 데려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난동을 부렸다면 이는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입니다. 쉬폰씨가 실제로 대량 주문을 할 마음도 없으면서 ‘대량 주문을 할 테니 빵을 만들어달라’고 거짓말하고, 빵집 주인이 그 주문을 소화하느라 영업 시간과 자원을 거기에 쏟았다면 이는 분명히 업무방해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몇몇 기사에서는 ‘고의적인 노쇼는 업무방해에 해당하나, 사실상 이를 입증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도 보이는데,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도 검사 시절에 고의적인 노쇼 사건을 수사해 업무방해로 기소해 본 적이 있으니까요. 입증의 핵심은 ‘정상적으로 대금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갈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담당 수사관이라면, 먼저 쉬폰씨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연락해 볼 것 같습니다. 280개나 되는 빵을 돌리려고 계획을 세우면서 유치원에 미리 확인해 보지 않는 학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일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위생과 안전을 이유로 외부 음식을 아예 받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만일 쉬폰씨가 유치원에 빵을 돌려도 되는지 문의한 적이 있다면 이는 쉬폰씨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될 것이고, 그런 문의를 아예 한 적이 없다면 이건 쉬폰씨에게 불리한 정황이 될 것입니다.

세계일보

서아람 변호사


쉬폰씨의 휴대폰을 확인해볼 수도 있겠지요. 쉬폰씨가 빵을 돌리는 것에 대하여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 아니면 다른 학부모들과 논의한 적이 있는지, 280개나 되는 빵을 픽업해서 유치원까지 나르려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빵집 폐쇄회로(CC)TV를 국과수에 보내 영상 분석을 해보거나, 거짓말탐지기를 해볼 수도 있고, 범행 동기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기소했던 노쇼 사건의 경우, 일면식 없는 손님인 줄 알았던 피의자가 알고 보니 경쟁업체 사장의 아들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무사히 유죄 판결까지 받아낼 수 있었죠.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력은 사건의 경중을 가리지 않습니다. 과연 이 사건의 전모는 무엇일지, 어떻게 밝혀질지 무척 궁금한데요. 고의적인 노쇼든 아니든, 주문 한 건 한 건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누구의 잘못이고 실수였던 간에, 나로 인해 누군가가 며칠 분 매상을 통째로 날리게 되었다면 그에 대한 첫 반응은 ‘죄송합니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서아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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