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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중국읽기] 베이징 이자성 동상은 왜 철거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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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중국 베이징 도심에서 팔달령(八達嶺) 만리장성이나 명십삼릉(明十三陵)으로 가려면 창핑(昌平)구를 지나게 되는데 이때 꼭 보게 되는 청동 기마상이 있다. 1994년 만들어진 높이 4m, 무게 6t의 이자성(李自成) 동상이 그것이다. 이자성은 명을 무너뜨린 반란군의 수장으로 동상은 이자성이 베이징으로 진군할 때의 모습을 담았다. 이자성은 순(順)나라를 세웠지만, 베이징 통치 40여 일 만에 명과 청의 연합군에 패해 단명했다.

베이징의 자금성 뒤 징산(景山)공원에 가면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목을 맸다는 나무가 마치 전설처럼 거론되기도 한다. 명 입장에서 이자성은 천하의 역적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달랐다. 이자성이 농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며 긍정 평가했다. 농민 반란을 찬양하는 민중사관에 따른 것이다. 마오는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는 말도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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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창핑구의 이자성 동상이 30년 만에 철거되며 뭇 억측을 낳고 있다. [바이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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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는 장제스의 국민당을 밀어내고 베이징에 입성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자성처럼 되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이자성 부대가 베이징 점령 때 저지른 만행을 되풀이해선 안 되고 또 이자성 정권처럼 단명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자성은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농민 출신의 영웅이자 한족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창핑구의 동상도 그런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한데 30년 자리를 지키던 동상이 지난달 말 조용히 철거됐다. 동상은 이자성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상난(商南)현의 틈왕채(闖王寨) 관광지구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자성의 별칭은 틈왕(闖王)이다. 말이 문 사이를 박차고 나가는 것과 같이 용맹하다는 뜻이 있다. 한데 이번 동상의 이전을 두고 중국 일각에서 묘한 소리가 나온다. 민초의 반란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걸 우려한 조치가 아니냐는 것이다.

1606년 태어난 이자성은 10대 때 부모를 잃고 20대 초반에 호구지책을 위해 역졸(驛卒)이 됐다. 한데 숭정제 때 재정 악화로 역참을 줄이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자성이 농민 반란에 뛰어들게 된 계기다. 중국은 현재 청년 실업률로 걱정이 태산 같다. 자연스럽게 실업자에서 반란군으로 변신해 정권 타도에 나섰던 이자성이 현대 청년의 롤모델이 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이자성 동상을 베이징에서 고향인 산시성으로 옮기는 진짜 이유가 아니냐는 억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이 한층 더 새롭게 느껴지는 하루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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