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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2중 약자 필리핀 아내 “그는 내 삶을 망치로 파괴했다” [우리사회 레버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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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앞에서 둔기로 폭행
10년간의 남편폭력 트라우마
아이들 위해 일어서려 노력
“지금처럼만, 되찾은 일상 감사”

헤럴드경제

가정폭력 피해자 A씨는 최근 일상의 행복을 찾아나서고 있다며 가족과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에 놀러가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안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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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된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쾅쾅쾅….’ “문 좀 열어보세요. 경찰입니다.” 올해 1월 13일 오후 10시50분께 서울의 한 빌라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가정 내 큰 싸움이 일어난 것 같다는 이웃의 신고에 경찰이 출동한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선 경찰에게 A씨의 남편은 ‘돌아가라’며 짜증을 냈고, 아내인 필리핀 여성 A씨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바닥에는 망치가 놓여 있었으며, A씨의 머리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남편은 두 자녀가 보는 앞에서 망치로 A씨의 왼쪽 머리와 왼쪽 어깨를 내리쳤고, 주먹으로는 A씨의 오른쪽 머리를 가격한 것으로 확인됐다. 남편은 특수상해와 아동학대 혐의를 받아 A씨와 분리 조치됐다. 재판부는 남편에게 1년 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현재 남편은 구속수감 상태다.

사건이 발생한 날로부터 약 4개월 후인 5월 21일, 헤럴드경제와 만난 A씨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씩씩하게 행복을 찾아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자녀들과 경기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으로 힐링 캠프도 다녀왔다고 했다. A씨는 “날씨도 따뜻하고 나무도 푸릇푸릇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밝게 웃는 걸 보니 ‘자식 때문에 산다’는 말이 뭔지 알겠더라”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10년 만에 잃어버린 자유를 찾은 느낌”이라며 “걱정과 부정적인 생각이 불쑥 튀어나와도 지금의 행복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4면

▶“10년 전이라면…필리핀도 안 떠나고 결혼도 안 할 것”=A씨는 10여 년 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며 자유를 빼앗겼다. 2012년까지만 해도 A씨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준비하던 청년이었다. 마닐라에서 3일 동안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A씨는 마닐라의 한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었다.

생계와 학업 모두를 놓칠 수 없었던 A씨는 매일 오후 1~5시에 공부를,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계속되는 밤샘에도 힘든 줄 몰랐던 이유는 당시에는 적어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A씨는 “친동생이 나처럼 대학을 가고 싶어했다. 동생에게 ‘내가 졸업하고 취업까지 하면 네가 대학에 갈 수 있게 꼭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졸업을 해도 취업은 쉽지 않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돈마저 부족해 A씨의 희망은 금방 꺾였다. 답답해 하던 그에게 한 친구가 한국 남자와 결혼을 추천했다. A씨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으나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일자리를 얻으면 적어도 동생에게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A씨가 필리핀에서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넘어온 이유다. A씨는 그렇게 2013년 가을 2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과 26살이나 차이가 나는 50대 남성과 결혼을 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전 필리핀도 떠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을 겁니다.” A씨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A씨는 낯선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남편이 구속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지옥 속에서 살았다고 털어놨다. 남편은 한국말이 서툰 A씨에게 ‘말이 안 통한다’며 욕을 퍼부었고, 수시로 칼을 꺼내 겨누며 ‘도망가면 죽는다’고 협박했다. A씨가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는 과정은 여과없이 어린 자녀들에게 노출됐다. 그는 “아이들이 제가 맞는 걸 보긴 봤어도 어려서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기억하더라”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험한 것만 보고 자란 것 같아 너무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했다.

특히 큰딸은 ‘어디선가 아빠 목소리가 자꾸 들린다’며 이명과 환청으로 괴로워한다고 A씨는 설명했다. 그는 “큰딸은 자신의 이름을 ‘성인 남성’이 부르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며 다급히 나를 찾기도 했다”며 “방 구석에 쪼그려앉아 귀를 막고 있는 큰딸의 모습을 볼 때면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고 했다.

▶“딱 지금처럼만”…현재에 집중하며 잃어버린 일상 되찾아=A씨는 자신도 모르게 옥상을 향해 걸어올라갔던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옥상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니까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어두워졌어요. 이대로 떨어져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려던 순간 A씨를 멈춰세운 건 큰딸 목소리였다.

“엄마 뭐해?”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A씨를 찾기 위해 큰딸이 옥상에 올라온 것이다. 큰딸은 A씨 다리를 붙잡으며 “엄마 죽으면 안돼. 엄마 없으면 나도 죽고 싶어”라고 외쳤다. A씨는 “그 말을 들으니 ‘아, 내가 딸 두고 이러면 안 되지. 정신차리자’ 싶었다”며 “‘엄마가 파이팅이야, 엄마가 포기하지 않을게. 미안해’라고 말하며 우는 큰딸을 다독였다”고 털어놨다.그날 A씨는 큰딸과 옥상에서 내려오며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아이들이 누려야 할 재미와 행복마저 뺏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A씨는 회복을 위해 대검찰청의 지원을 받아 아이들과 임시주택으로 터를 옮겼다. 심리 상담도 열 차례 넘게 받았다. 자녀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식당이나 호텔에 나가 설거지와 청소 등의 일을 하며 생활비를 모았고, 퇴근 후에는 학교 수업을 마친 자녀들을 데리고 놀이터와 강가 산책로에 가 ‘가족 시간’을 보냈다. A씨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랑 제가 같이 있는 순간을 만끽하는 ‘가족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했다. 한국에 사는 필리핀 친구들의 도움도 받고 있다.

“하얀 공을 여니 카네이션이 툭 튀어나왔는데, 그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엄마, 나랑 동생 키워줘서 고마워요’라고 써 있었어요.” A씨는 올해 어버이날 큰딸로부터 받은 카네이션을 자랑했다. 그는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들이 많아 늘 미안한 마음 뿐이라 감사 편지를 받으니 뭉클했다”며 “못난 모습 많이 보여줬지만 그래도 내가 엄마로서 자식들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울컥하기도 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요즘 A씨는 일요일마다 동네 성당에 나가 두 가지 내용의 기도를 한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과 나중에 어려움이 닥쳐도 엄마로서 힘을 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도다. A씨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A씨의 목표는 올해 안에 가족들과 필리핀에 있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는 결혼 이후 11년 동안 가지 못했던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자녀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A씨는 “부모님이 아직 아이들을 한번도 보지 못해서 궁금한 게 많은 것 같다”며 “더 늦기 전에 올해는 꼭 우리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가족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A씨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현재에 집중해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한번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더라고요. 이제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그리웠던 건지, 얼마나 바랐던 건지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힘들 땐 과거나 미래를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도 방법인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안효정 기자

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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