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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4 (목)

[앵커칼럼 오늘] 가늘고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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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처럼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그게 내 꿈이다, 태수야."

폭력조직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그가 거절합니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가늘고 길게 인생을, 배우로서 가늘고 길게… 굵고 짧게, 싫습니다."

가수 송창식이 명상을 하다 문득 떠올렸다는 곡입니다. 어렵게 자란 그는 노숙을 하며 두 해 겨울을 났습니다. 체온을 유지하려고 가늘고 길게 숨을 쉬면서 명상 호흡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교감-교장 승진을 포기한 고참 교사들을 '교포'라고 부릅니다.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평교사로 지내는 게 편하다는 겁니다.

대기업에도 '임포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짐이 무겁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임원이 싫답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8년 만에 승진 거부권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노조를 탈퇴해야 하는 직급이 될 때 승진을 거부할 권리를 달랍니다. 높은 자리와 월급도 마다하고, 정년을 보장받으며 오래 다니겠다는 얘기입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차 노조가 처음 승진 거부권을 내밀었을 때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만년 대리로 지내겠다니 한심하다고들 했지요.

사측은 인사권 침해라고 했습니다. 저성장을 돌파하려면 업무 능력과 생산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데 웬 배부른 소리냐며 거부권을 거부했습니다.

현대차가 파업 수순을 밟자 정치권에서도 날 선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뜬금없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와, 백 세 시대 실직 공포에 떠는 중장년에겐 남 얘기가 아닙니다.

대기업 노조들이 정년 연장을 꺼내든 것도 그렇습니다. 비슷한 세태가, 미국 직장에 부는 '조용한 사직' 바람입니다.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업무 이상을 기대하는 문화를 거부하는 겁니다."

가치관과 직업관 변화에 맞춰 기업 인사체제도 달라져야겠지요.

하지만 대한민국의 엔진에서 헌신과 열정이 식어버린다면 소는 누가 키우는 건가요. 우리 사회가 근로 의욕을 북돋우지 못하면, 가늘고 긴 면발이 퉁퉁 불어버릴지 모릅니다. 뭉친 쫄면을 젓가락으로 풀어헤치며 탄식하듯.

'실수였다. 가늘고 길게 살려던 것이.'

6월 12일 앵커칼럼 오늘 '가늘고 길게' 였습니다.

윤정호 기자(jhy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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