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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녹색처방전 받아 갑니다”…꽃·채소와 함께 몸과 마음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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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에 있는 고은원예치료센터에서 김영숙 센터장과 어르신들이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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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찾아간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의 고은원예치료센터에는 상추와 딸기, 토마토 등 텃밭 작물 20여종에, 팬지와 마리골드 등 식용 꽃 10여종과 라벤더와 로즈메리 등 허브 30여종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상자 텃밭 사이에서 어르신 7명이 바구니를 든 채 바삐 손을 놀리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해당화 꽃잎을 따는 김인민(79) 할머니의 입에선 흥얼흥얼 “해당화 피어나는 내 고향 남쪽 바다”라는 노랫말까지 흘러나왔다.





바구니를 금세 채운 식용 꽃들





김씨는 “꽃향기가 너무 좋다. 집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좋은데, 이렇게 꽃밭을 걷고 향기를 맡다 보니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진 것 같다. 꽃이 너무 예뻐 딸 때 조금 미안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바구니는 금세 알록달록 다양한 식용 꽃들로 가득 찼다.



실내로 자리를 옮긴 어르신들은 각자 딴 꽃잎을 깨끗하게 씻은 뒤 김영숙 고은원예치료센터장을 따라 ‘허브꽃청’ 만들기를 시작했다. 김 대표는 투명한 병을 꺼낸 뒤 제일 먼저 초록색 허브를 넣고 그 위에 노란색 레몬 조각, 또 그 위에 식용 꽃을 차례로 넣었다. 이 순서대로 허브와 레몬, 식용 꽃을 넣는 일을 다섯차례 반복하니 병이 채워졌다.



이종달(79) 할아버지가 레몬 조각을 넣고 잠시 멈칫하더니 김 센터장에게 “여기 위에 또 뭘 넣었죠?”라고 물었다. 김 센터장은 “허브를 넣으셨고, 레몬을 넣으셨으니 그다음엔 꽃을 넣으시면 됩니다. 허브-레몬-꽃 순서만 기억하세요”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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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에 있는 고은원예치료센터에서 김영숙 센터장과 어르신들이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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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꽃청을 만드는 내내 즐거운 수다가 이어졌다. 김 센터장이 장우철(84)·박희순(82) 부부에게 결혼하게 된 사연을 물었다. 장씨가 쑥스러워하며 말을 꺼내지 못하자 박씨가 입을 열었다. “내가 댕기머리를 하고 다닐 때니까, 벌써 까마득한 옛날이네. 그때 내가 좋다고 매일 편지를 써서 주는 거야. 내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남편은 옆에서 나팔을 불었지. 그 당시엔 다 중매를 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연애결혼을 했어.”



조유순(69)씨는 “꽃을 보면 힐링되는 느낌이 든다. 한평생 꽃은 그저 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먹는 꽃이 이렇게 많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고 했다. 이종달씨는 “처음엔 남자가 꽃 따서 뭐 하냐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너무나 즐거워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며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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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에 있는 고은원예치료센터에서 김영숙 센터장과 어르신들이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박수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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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센터를 찾은 7명은 치매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인 어르신과 가족들이다. 화천에 사는 이들은 화천치매안심센터가 진행 중인 ‘야외치유 프로그램―치유농장’에 참여하기 위해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을 찾았다. 화천군치매안심센터의 김명은 치매안심팀장은 “치유농장의 다양한 식물 자원을 활용해 인지 자극을 주고, 주의력·기억력 훈련도 하고 있다. 감각 기관이 충분히 자극받은 탓인지 건강도 좋아지고 있다. 병간호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온 가족들 반응도 너무나 좋다”고 귀띔했다.





치유농업, 1990년대 유럽에서 시작





과잉 경쟁과 급변하는 시대 속에 스트레스와 불안 등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신체와 정신의 회복을 도모하는 치유농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치유농업’이란 농업·농촌 자원이나 이를 이용해 국민의 신체와 정서, 심리, 인지 등의 건강을 도모하는 활동을 뜻한다. 일반 농사와의 가장 큰 차이는 농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건강 회복 수단으로 농업을 활용한다는 데 있다.



치유농업은 유럽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유럽에서는 1990년대부터 케어파밍(care farming), 소셜팜(social farm), 그린케어(green care) 등의 이름으로 치유농업을 보건복지 정책과 연계해 보급해왔다. 최소영 농촌진흥청 농촌자원과장은 “우리 조상들도 집 주변에 채송화와 나팔꽃 등을 심고 가꿨다. 생산 중심인 농업의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자연과 교감하며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런 활동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신건강 문제를 예방하고 치유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는 농촌진흥청이 1994년부터 원예작물의 치유 효과 연구를 시작했다. 2021년 3월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 시행 이후에는 제1차 종합계획(2022~2026)을 수립하고 원예와 곤충, 자연경관, 동물매개 등 농업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치유농업 자원을 발굴하고 과학적 효과를 검증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그 결과 만성질환자와 치매 환자, 소외 계층, 민원 담당 공무원, 아동, 성인 등을 상대로 46종에 이르는 대상자별 맞춤형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치유농업이 큰 효과를 발휘하는 분야는 노인 인지 건강 분야다. 2021년 농촌진흥청이 보건복지부와 협업해 전북 정읍과 진안 지역 치매안심센터 노인을 대상으로 주 1회(회당 2시간)씩 모두 10차례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인지기능 검사(치매 선별용 간이 정신상태 검사)를 했더니 인지 기능이 19.4% 향상됐다고 한다. 또 기억장애 문제는 40.3% 줄고 우울감도 68.3%나 감소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 100여곳 이상의 치매안심센터가 치유농장과 협력해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재호 농촌진흥청장은 “치유농업을 통한 질병 예방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돌봄 문제 등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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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치유산업포럼이 지난해 5월 서울에서 제1회 창립 기념 세미나를 개최한 모습. 스마트치유산업포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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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로 확산되는 치유산업





최근 ‘치유’라는 개념은 농업뿐 아니라 산림치유, 해양치유, 관광치유, 음식치유, 매체치유 등 다양한 산업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치유농업은 농촌진흥청, 산림치유는 산림청, 해양치유는 해양수산부, 관광치유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 관련 법을 제정하는 등 산업 육성에 힘쓰고 있다. 민간 영역에서도 음식치유나 명상치유, 음악치유, 미술치유 등 다양한 산업 분야가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관련 분야 전문가 등이 뭉쳐 ‘스마트치유산업포럼’까지 창립하는 등 연구개발 투자 확대를 통한 산업화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김재수 스마트치유산업포럼 이사장은 “치유산업은 지방이 경쟁력을 가진 분야다. 지방의 산과 강, 들, 바다는 수도권으로 이전할 수 없다. 치유산업은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지역 일자리 창출과 지방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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