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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1 (금)

[삶의 향기] 소문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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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미옥 문예평론가


어릴 때 나의 할머니는 ‘소문의 벽’이었다. 동네 여자들이 이런저런 하소연과 소문을 전달하면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들었다. 동조하거나 한숨을 쉬거나 가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일이 커져 소문의 당사자가 확인차 방문하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단칼에 잘랐다.



비밀 말하고 싶은 인간의 충동

어떤 소문도 객관적이지 않아

전달자 신뢰도 따라 진위 좌우

중앙일보

일러스트=김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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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는 기억력이 대단했고 그 위에 메모의 습관도 갖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소견에 할머니도 들어놓고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 할머니의 답변은 흥미로웠다. 누군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하는 말은 믿지 말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목소리를 갑자기 낮추는 자’에 대한 불신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비밀을 얼마나 오래 갖고 갈 수 있을까?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가 박준의 작품 속 이야기다. 제목이 ‘벌거벗은 사장님’이었다. 산속의 어느 별장으로 사장을 모시고 간 운전기사는 거기 왔었다는 사실을 함구하고 심지어 잊어버릴 것을 강요받는다. 사장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말하지 못하는 고통과 발설을 감시하는 눈을 의식하다 정신이 무너져 결국 회사에서 쫓겨난다.

누구나 비밀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가끔 소문을 여러 사람이 전달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왜곡이나 과장을 떠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가미하는데 본인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에 대한 축적된 지식까지 동원된 소문을 듣노라면 완성된 서사를 보는 것 같다.

소문은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달자의 신뢰도에 따라 진위가 결정된다. 그 사람은 절대 허튼 소리할 인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소설의 탄생’을 보는 기분이었다. 전달자들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옮긴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에 자기 생각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파악도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소문의 벽』 속의 소설가 박준은 불빛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잠든 방에 손전등의 불빛이 갑자기 쏟아진다. 그리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 엄마와 아들은 불빛 뒤의 검은 그림자인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쟁 중인 상황에 대답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절망에 빠진 엄마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아들은 평생 불빛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된다.

성장해서 소설가가 된 박준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 행위란 어떻게 보면 한 작가의 가장 성실한 자기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 전짓불 아래서 나의 진술을 행하고 있는지 때때로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소문의 날개에 왜 전달자들의 생각이 올라타는지 이해할 것 같다. 자신들의 경험과 트라우마가 묻은 전달자의 얘기를 들으면 문득 소설이 ‘확장된 소문’은 아닌가 싶어진다. 어떤 소문도 객관적이지 않다는 말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날개가 달린 소문도 벽에 부딪힌다.

소문의 벽이 되는 사람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침묵하거나 화제를 돌려 전달자의 능동적인 자세를 순식간에 의기소침하게 만드는데, 대부분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는 유형들이다. 물론 그들도 전달자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소문 당사자의 분노를 사는 날벼락을 맞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당사자나 전달자나 양쪽 다 객관적인 자세는 아니다.

어떤 실험에서 부정적인 소문을 전달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정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보력의 과시와 자신은 그런 소문의 당사자와는 다른 인간이라는 적극적인 방어 태도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문보다 전달하는 사람의 풍부한 상상력과 축적된 경험에 관심이 많다. 생각이 들어간 부분을 유심히 듣다가 감탄의 지경에 이르면 소설을 쓰라고 권유한다.

작은 소문 하나로 거대한(?) 서사를 완성하는 재주는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왕성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탐구를 글로 쓰면 더할 나위 없다고 유혹한다. 이런 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열심히 글을 쓰는 지인들이 있다. 대신 그동안 글로 할 것을 말로 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맞춤법이나 사소한 문장의 실수, 기승전결의 서사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온갖 잔소리를 퍼붓는데도 유순하게 열심히 글을 쓴다. 어쩌면 ‘소문의 벽’이란 말이 아닌 글이었는지 모르겠다. 실제 그들은 글 쓰느라 바빠서 소문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도 과묵한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동네 여자들은 대숲에 온 듯 안심하고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털어놓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도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충격을 흡수하며 살았다. 오래된 공책의 비뚤거리던 언문은 할머니에게 ‘소문의 벽’이었던가.

김미옥 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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