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8 (화)

[오정근의 이코노믹스] 반도체 착시 걷어내고 원·엔 환율 하락 막아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34년만의 수퍼 엔저, 또다른 경제 위기 전조일까



중앙일보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엔·달러 환율이 34년 만에 처음으로 160엔을 돌파했다. 지난 4월 29일 아시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오전 한때 160.17엔까지 치솟았다. 1990년 4월 이후 처음이다. 이후 일본은행(BOJ)의 개입으로 엔화가치는 달러당 155엔대에서 등락을 지속하고 있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가 하락(엔화 환율 급등)하는 ‘수퍼 엔저 시대’가 열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수퍼 엔저 현상은 미국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조절하기 위해 현재 연 5.25∼5.5%인 기준금리(연방기금금리)의 인하 시기를 늦추는 반면 일본은 제로에 가까운 금리 정책(0∼0.1%)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BOJ의 이러한 정책은 30년 저물가와 장기 불황을 해소하기 위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일 금리차 속 엔화가치 급락

한국 제품 경쟁력 하락에 직면

역대 위기, 수출 타격에서 비롯

정치 혼란 가중되며 경제위기로

반도체 뺀 무역수지 6년째 적자

산업 전체 엔저 영향 잘 살펴야

한국과 일본 수출 경합도 69.2

중앙일보

이코노믹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 고금리 지속으로 인한 달러 가치 상승으로 원·달러 환율도 상승(원화가치 하락)하지만, 엔화 약세를 따라가지 못해 원·엔 환율이 급락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1~12년 100엔당 1400원 선이었던 원·엔 환율은 2013년부터 2022년 3월까지 100엔당 평균 1038원 안팎에서 등락을 보여왔다. 2022년 4월부터 2023년 10월까지는 100엔당 평균 953원 선에서 등락하다 수퍼 엔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는 100엔당 평균 893원 선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비교적 장기추세였던 1038원대보다 14%나 하락한 수준이다.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수퍼 엔저 현상은 한국 경제에도 큰 부담이다. 엔화 약세로 일본 상품의 달러 표시 가격이 낮아지면서 해외 시장에서 경합하는 한국 상품이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한국 수출품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철강이나 석유화학, 자동차·부품, 선박, 기계류 등 일본 수출품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제품이 많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경합도는 69.2로, 미국(68.5)·독일(60.3)·중국(56.0) 등 주요 국가 중 가장 높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1%포인트 내리면 한국의 수출 가격은 0.41%포인트, 수출 물량은 0.20%포인트 하락한다는 분석이다.

올해 하반기 한두 차례 미국 금리가 인하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만, 일본은 경기 회복 부진으로 저금리 정책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당분간 수퍼 엔저가 지속할 전망이다. 한국은 외국자본 유출 우려와 물가 안정을 위한 수입 물가 안정을 위해 원·달러 환율의 상승(원화가치 하락)을 두고 보기 힘든 실정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외환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32억6000만달러로, 3월 말(4192억5000만달러)보다 59억9000만달러 감소했다. 원·달러 환율 상승 방어를 위한 시장 개입 결과로 추정된다.

원·엔 환율 하락이 지속하고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되면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에 정쟁이 격화하며 정치 및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국정 공백 사태까지 가는 정치 위기가 오면 경제 위기도 뒤따른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그런 경우였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1994년 1월부터 1995년 4월까지 기준금리를 3.0%에서 6.0%로 인상했다. ‘역(逆) 플라자 합의’로 엔·달러 환율은 1995년 4월 달러당 83.59엔을 저점으로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은 고금리 저환율 정책을 추진한 결과 원·엔 환율이 하락해 수출이 악화했다. 원·엔 환율은 1995년 4월 100엔당 918.5원에서 1997년 2월 704.7원, 1997년 3월 716.8원, 1997년 4월 711.4원까지 하락했다. 그 결과 1994년과 95년 각각 16.8%와 30.3%였던 수출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1996년(3.7%)과 1997년(5.0%)에 큰 폭으로 줄어든 뒤 1998년(-2.8%)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급속히 악화했다. 수출 급감으로 1996년부터 경기 침체가 시작되며 기업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고,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건설과 철강 등 주요 산업 분야의 대기업도 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원·엔 환율 떨어지자 한국 수출 급감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이런 분위기 속에 1997년 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의 한보그룹 개입 의혹과 국정 개입 사태가 터지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그해 5월 김현철 씨가 한보그룹 개입 문제가 아닌 정치 자금에 대한 증여세 포탈 혐의로 구속 수감되면서 집권 5년 차에 접어들었던 김영삼 정권의 국정 동력은 급격히 약화했다. 한보와 삼미·진로 등 대기업이 부도를 맞았다. 민주노총 파업이 이어지면서 노동개혁은 불발되고, 기업 구조조정도 하지 못한 채 기업 부실이 가속화되고 금융 부실도 커졌다.

결국 외국 금융기관 대출금을 중심으로 외국 자금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외환보유액은 고갈돼 1997년 11월 외환보유액은 24억4000만 달러까지 감소했다. 국내은행 해외지점 예치액을 제외한 가용 외환보유액은 7억3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외환 지급결제 불능 사태가 우려되자 한국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 금융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엔화 약세와 원·엔 환율 하락, 정치적 혼란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닷컴 버블로 추락한 미국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이 달러 약세 정책을 추진하며 원화가치가 뛰며 원·엔 환율은 2004년 100엔당 1058원에서 2007년 100엔당 789원까지 하락했다. 그 영향으로 수출 증가율은 2004년 31.0%에서 2005년 12.0%로 급락했다. 2006년(14.4%)과 2007년 (14.1%)에도 비슷한 흐름을 이어갔다. 국정 동력도 약화했다. 2008년 2월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그해 4월 한미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을 발표한 뒤 MBC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로 연인원 100만명이 참여하는 촛불 집회가 3개월간 지속하며 새 정부의 국정 동력이 급격히 약화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경제는 충격에 빠졌다. 2009년 수출증가율은 -13.9%로 급락했다. 외국인 주식 투자금과 은행 차입금을 중심으로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유출돼 2642억 달러였던 외환보유액이 2008년 11월에는 2005억달러로 줄었다. 원·엔 환율 하락과 정치적 혼란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보여줬다.

엔저 속 수출 호조는 반도체 덕

중앙일보

신재민 기자


원·엔 환율이 급락하는 상황 속에서 1997년과 2008년과 달리 최근에는 한국의 수출이 증가하며 올해 1분기에는 1.3%(전 분기 대비·속보치)의 이례적인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단연 반도체 수출 증가가 성장률을 끌어올렸다. 반도체 수출이 살아나며 경상수지도 지난해 5월 흑자로 전환했다. 한국의 수출은 반도체 수출에 크게 좌지우지됐다. 대(對) 중국 수출만 살펴봐도 경향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반도체 수출이 호조를 보일 때는 대 중국 수출이 호조였고, 반도체 수출이 부진했던 2023년 초에는 한국의 대 중국 수출도 부진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대 중국 반도체 수출이 반등하면서 한국 전체 수출도 증가했고, 그 결과 경상수지도 흑자로 돌아서고 성장률도 반등한 것이다.

1분기 ‘깜짝’ 성장에도 경기는 양극화

문제는 반도체를 제외했을 때다. 반도체를 제외한 대 중국 수출은 2013년 1238억 달러를 정점으로 지속적으로 하락해 지난해에는 800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반도체를 제외한 무역수지는 2018년 이후 적자를 지속하고 있다. 경기 양극화 현상도 나타난다. 반도체를 포함한 대기업과 반도체를 제외한 중소기업 중심의 경기가 다른 것이다. 제조업 경기 상승 흐름 속 반도체를 제외한 경기는 여전히 부진한 수준을 지속하고 있다. 대기업의 생산지수 증가율은 상승하지만, 중소기업의 생산지수 증가율은 마이너스를 지속하고 있다. 그로 인해 3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정상 수준(82%)을 밑도는 71.3%에 머물고 있다. 1분기 ‘깜짝’ 성장에도 체감 경기가 동떨어져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총선 이후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사생결단식 정쟁만 가열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 위기와 국정 공백 사태를 맞을 우려도 커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엔 환율 하락 등으로 수출의 위기가 커지고 있는데 반도체 착시로 인해 위기의 신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수출과 성장률에서 반도체 착시 현상을 걷어내고 전체 산업 수출과 생산 동향을 면밀히 살펴보고 적절한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 경제 안보 전략 산업으로서 중요한 반도체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반도체를 제외한 다른 산업도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여전히 부진한 비(非)반도체 산업의 수출을 증진하는 대책 중 하나가 과도한 원·엔 환율 하락을 막는 일이다. 정쟁으로 인한 정치 위기로 인해 적절한 대응과 대책을 추진하지 못하면 또 다른 경제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해 온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