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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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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고용직’ 캐디도 직장 내 괴롭힘 적용… 민사상 첫 불법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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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인정 안 되는 캐디, 대법서 직장 내 괴롭힘 확정판결

법원, 근로기준법 아닌 “산업안전보건법상 보호의무 안 지켜”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민사상 불법행위 책임이 처음으로 인정됐다. 대법원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어도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를 근거로 직장 내 괴롭힘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26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건국대가 경기 파주시에서 운영하는 골프장에 근무하던 캐디 배모씨 사망사건에 건국대 법인이 낸 상고를 지난 17일 모두 기각했다. 배씨는 이 골프장에서 2019년 7월부터 일하기 시작해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다 1년2개월 정도 뒤인 2020년 9월 사망했다. 배씨 사망 후 유족은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고양지청에 이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으나 고양지청은 “행위 자체로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배씨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아 ‘관련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계일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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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고양지사는 ‘업무상 질병’을 인정하면서도 산업재해 보상은 불가하다고 결정했다. 배씨를 비롯한 캐디들은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를 작성하는 탓이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를 1명 이상 고용하는 사업장은 산재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지만, 당시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는 제외 신청서를 작성할 경우 이에 예외라는 점을 회사가 악용한 것이다.

유족 측은 배씨의 상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동시에 건국대 법인에도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켰다면 그 피해자가 반드시 근로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며 배씨 상사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했다. 또 건국대 법인에는 배씨 상사의 사용자로서 주의 의무를 기울이지 않은 데 배상책임을 물었다. 재판부는 ‘배씨가 항의하는 취지의 인터넷 게시판 글을 남겼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오히려 글을 삭제하고 배씨를 카페에서 탈퇴시킨 점’ 등을 건국대 법인이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근거로 들었다. 1심 재판부는 유족에게 1억7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양측 모두 항소했으나 2심은 이를 모두 기각했다. 2심 재판부 역시 건국대 법인이 특수형태근로자인 고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고 가해자의 불법행위를 알 수 있었음에도 사망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산업안전보건법상 노무제공을 받는 사업주가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건국대 법인은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기각하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직장갑질119에는 여전히 캐디 등 각종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직장 내 괴롭힘 사연이 접수되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라운딩한 손님이 제게 컴플레인을 남기자 상사가 제게 휴무에 전화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이후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고 아무 근거도 없이 제가 자신을 험담한다며 사람들 앞에서 사과를 강요하기도 했다’고 했다. 지난해 7월 또 다른 캐디는 ‘경기팀장이 캐디들에게 특정 보험 가입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보험모집수당과 유지수당을 챙겼고, 보험 가입 등 본인의 요구를 듣지 않는 캐디는 괴롭혀 내보냈다’고 전했다.

직장갑질119는 “이번 판결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하고 산업안전보건법에 근거해 괴롭힘 피해 방지를 위한 회사의 직접적 책임을 인정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라며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규정을 적용받지 못했던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의 산업안전보건법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의 근거가 된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부터 노무를 제공받는 자’와 ‘물건의 수거 배달 등을 중개하는 자’는 근로자의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일 수 있는 쾌적한 작업환경 조성 및 근로조건 개선 책임이 있다고 규정한다.

다만 이 단체는 “근로기준법의 한계 역시 다시 한번 확인됐다”며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는 형식상 자영업자, 개인사업자로 분류돼도 현실적으로는 사업주에게 종속 내지 의존된 근로자임에도 근로기준법은 이들을 근로자로 규정하지 않아 이들은 대부분의 개별적 노동관계법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부당지시’ 같은 괴롭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사용자 개념을 확장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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