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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퓨리오사, 총과 근육이 지배하는 땅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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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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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퓨리오사가 돌아왔다.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는 여성영웅 퓨리오사와 함께 할리우드 여성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다. 이때 함께한 건 ‘겨울왕국’의 엘사였다. 둘 다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었으나, 엘사가 왕국의 질서를 지키는 여왕으로 자랐다면 퓨리오사는 왕국 자체를 깨부수며 영웅이 되었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의 프리퀄로, 퓨리오사가 어째서 ‘시타델’의 귀족 지위를 버리고 반란을 도모하는 자가 되었는지 따라간다.





달라진 퓨리오사의 신체





영화는 ‘분노의 도로’에서 우리 모두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했던 땅, 그린랜드에서 시작된다. 어린 퓨리오사는 붉고 탐스러운 과일을 따던 중 바이크 군단에게 납치된다. 폭군 디멘투스는 그를 이용해 그린랜드를 찾으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퓨리오사의 어머니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한편 ‘시타델’의 임모탄과 충돌하게 된 디멘투스는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퓨리오사를 임모탄에게 넘긴다. 그곳에서 어린 퓨리오사는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그렇게 임모탄의 근위대장, 임페라토르 퓨리오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퓨리오사’는 전작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사막 전투의 스펙터클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전작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파국 이후의 시공간을 묘사한다. 그곳은 독재자가 군사력으로 지배하는 정치적 헤드쿼터 ‘시타델’과 자원을 채굴하는 ‘가스타운’, 그리고 무기를 생산하는 ‘무기 농장’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1편에선 가려져 있었던 정치·경제적 구조가 디멘투스라는 외부 세력과 함께 모래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네트워크의 핵심은 유통이고, 퓨리오사의 거대한 트럭이 그토록 중요했던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퓨리오사’는 그저 충실한 프리퀄에 머물지 않는다. 차이들을 통해 전작에 비평적 코멘트를 다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퓨리오사의 신체성이다. 샬리즈 세런의 퓨리오사와 애니아 테일러조이의 퓨리오사는 신체 사이즈와 각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전투력의 특성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중요한 건 ‘퓨리오사’가 ‘분노의 도로’로 시간차 없이 바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두 배우 사이의 신체성 차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노의 도로’ 개봉 당시 관객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졌었다. 누군가는 임모탄의 성노예들을 해방시켜 ‘어머니의 땅’으로 향하는 퓨리오사에게서 페미니스트 전사의 모습을 보았다면, 다른 누군가는 “페미니즘과는 무관한 영화”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이는 퓨리오사의 큰 신체와 군인 정체성이 그를 ‘유사 남성’으로 만들기 때문에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라고 비판했다. 나로서는 세런의 퓨리오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여성의 신체 사이즈는 다양하며 큰 신체가 ‘남성적’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퓨리오사의 파워는 세런의 신체로 구현될 때에야 비로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조지 밀러는 과감하게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해버렸다. 세런과 비슷하지조차 않은 작고 얇은 몸피를 가진 테일러조이를 캐스팅한 것이다. 그로부터 테일러조이의 퓨리오사는 완전히 다른 자질을 가지게 된다. 그는 오히려 작고 가벼운 몸을 이용해 ‘시타델’에서 쓸모를 증명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액션의 성격도 달라진다. 파워가 아닌 날렵함이 그의 최고의 전투술이 되고, 사용하는 무기 역시 달라져 그의 스나이퍼로서의 역량이 스크린을 날카롭게 가른다. 덕분에 ‘미친 맥스’의 이야기에서 퓨리오사의 이야기로 완전히 리부트된 ‘매드맥스 사가’는 다양한 신체를 가진 여성들의 다양한 가능성이 활보하는 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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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지구의 파국





그러나 프리퀄이 고집스럽게 지킨 것도 있다. 바로 ‘씨앗’의 힘이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황폐화된 세계를 구하는 건 트럭을 몰고 주먹을 휘두르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파국 ‘이후’에 대한 꿈이 있었고, 그 꿈은 푸르른 땅의 가능성을 품은 씨앗과 함께 자랐다. 심고 기르고 먹일 뿐만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움에 나서는 어머니들이 퓨리오사에게 남긴 건 씨앗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었다.



‘퓨리오사’에서도 씨앗은 여전히 중요하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뿌리에 대한 기억이기도 한 붉은 과실의 씨는 퓨리오사가 중요한 행동을 개시할 때마다 그에게 용기를 주는 작지만 거대한 우주가 된다. 사실 씨앗이 상징하는 바야말로 조지 밀러의 오래된 주제의식이다. ‘매드맥스’ 3부작을 완성한 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동물의 세계였다. ‘미친 맥스’에 이어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된 것은 ‘행복한 돼지’(꼬마돼지 베이브)와 ‘춤추는 펭귄’(해피 피트)이었다. 그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어떻게 지구 행성에 파국을 초래하는지 탐색해왔고, ‘매드맥스 사가’에 이르러 그 ‘인간적 폭력’을 지탱하는 것이 군사주의와 전쟁임을 분명히 한다. 여성은 군사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영화는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해 감독의 또 한편의 판타지인 ‘3000년의 기다림’을 떠올리게 하는 동화 같은 결말로 답한다.



퓨리오사는 결국 디멘투스에게 복수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깔끔하게 머리에 총알을 박았을 수도, 어머니가 살해당한 방식대로 고문을 했을 수도, 그도 아니라면 디멘투스가 퓨리오사의 동반자인 잭을 죽였던 방식을 따랐을 수도 있다. 전설은 다양한 버전으로 세상을 떠돌고 있지만, 퓨리오사 본인이 남긴 버전은 이랬다. 디멘투스를 달콤한 열매를 맺는 붉은 과실 나무를 먹이고 키우는, 살아 있는 퇴비로 만들어버렸다는 것.(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겠으나,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인류에게 전쟁은 운명처럼 지속될 것이며 총과 근육을 가진 자들만이 생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지배하는 파국 이후의 땅에서, 가장 위대했던 군인 퓨리오사는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른 방식의 복수 혹은 결말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그는 억압받는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그것이 세계와 불화하는 여자들의 전투, 아니,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꿈꿔야 할 다른 전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손희정│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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