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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한국식 아파트가 싫었다, 집이 아이들에 스미길 바랐다"...그래서 지은 하남 주택 [집 공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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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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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하남의 미사누리공원에 접한 2층 주택.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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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시작의 연속이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집'이라는 그릇이 있으니, 집을 잘 빚는 것만큼 시작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방법도 없을 터. 결혼 생활을 시작할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을 꿈꿀 때 집을 짓는 사람이 많은 건 그래서다. 김동한(41) 현보라(43) 부부의 집 '비기너스(Beginners·대지면적 325㎡, 연면적 483.76㎡)'는 이름부터 그런 집이다. 밤낮없이 바쁘게 살았던 시절을 뒤로하고 제 속도에 맞춘 중년의 삶을 꿈꾼 부부는 집이자 일터인 집을 짓고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부는 가족끼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일하는 집'을 구상했다. 특히 직업 특성상 외박하는 날이 많던 남편 김동한씨가 오래 간직해온 바람이었다. 김씨는 영화 '곡성'을 비롯해 여러 영화의 음향을 만지는 사운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 30대에 일에 빠져 살다 보니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같이 보낸 기억이 많지 않아요. 소중한 시절을 더는 아깝게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에 더 미룰 수 없어 집 짓기를 단행했죠."

집터로 경기 양평과 하남을 놓고 고민하던 부부는 신도시 인프라를 누리면서도 다양한 공원을 지척에 둔 하남에 끌렸고 미사누리공원과 접한 100평(약 300㎡)대 대지를 샀다. 땅은 쉽게 찾았지만 설계 단계에서 진척이 더뎠다. 여러 건축가를 만났지만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판에 박힌 구조의 설계만 제안받고 실망을 거듭했다. 그러다 미국에서 귀국을 앞두고 있던 사촌 김동일 건축가(경희대 건축학부 조교수)와 연락이 닿았다. 김 건축가 역시 아내 이서주 건축가(아이에프건축연구소 소장)와 함께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던 때였다. "건축주가 소리를 매만지는 사람이다 보니 요구 사항이 디테일했어요. 계단의 '손 스침' 하나까지 말할 정도로요. 지나치게 세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집주인이 그리는 그림이 세밀할수록 설계에는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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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끝자락으로 진입하는 코너에 자리한 주택은 공원 녹지를 마당처럼 누린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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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튀기보다 '모두의 공원'에 스며드는 집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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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세대가 거주하는 3층은 거실, 아이방, 다락, 옥상까지 4개의 다른 레벨이 연결된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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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건축가는 집이 동한·보라씨 부부가 마련한 땅에 자리 잡는 이유를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설계 콘셉트는 '공원'에서 출발했다. 스스로 잘난 척 튀기보다는 조용히 공원의 배경이 되는 집, 그리고 공원의 자연을 충분히 누리는 집을 그렸다. "동네의 인상에 스며들려면 집을 어떤 자세로 앉혀야 할지 고민이 깊었어요. '여기는 내 땅이다'라고 선을 긋기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집이 공원 풍경의 일부가 됐으면 했죠. 1층을 비우고 공원과 맞닿은 쪽을 공원을 연장한 작은 정원으로 조성한 것도 그런 이유예요." '비기너스'의 1층 필로티 공간은 주차장과 현관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열려있다. 건물이 들어선 지 1년 만에 공원을 오고 가는 주민들이 지름길로 애용하는 골목길이자,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쉬어갈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됐다.

사옥을 겸한 주택은 외관부터 단순명료하다. 음향 스튜디오는 지하에, 가족의 주거 공간은 3, 4층에 마련했고, 2층에는 언젠가 부부의 부모님이 머물 공간을 배치했다. 지하 스튜디오는 층고 6m의 규모에 방점을 찍었다. 김 건축가는 "음향은 볼륨감이 중요한데 한 개 층이지만 두 개 층으로 나눠도 될 만큼 큰 사이즈"라며 "영화 사운드작업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사무 공간이 들어가는데, 개인 소유의 음향 스튜디오 규모로는 우리나라에서 2, 3위에 들 것"이라고 했다. 내부 엘리베이터를 타면 3층 안방에서 작업실까지 '1분 컷'. 지하의 선큰(sunken·자연광을 유도하기 위해 대지를 파낸 공간)에서 고개를 들면 시선이 안방 테라스까지 곧장 닿는다. 아직 미완인 작업실을 보며 "할 일이 태산이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동한씨의 표정엔 뿌듯함이 비쳤다. "공간을 성급하게 완성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쉽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공간으로 완성할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구석구석 고민이 배어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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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계단놀이터'라고 이름 붙인 계단실. 곡선 형태의 나무 난간 제작에 각별한 정성을 들였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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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공간 만든 스킵플로어...반 층마다 움직이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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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부모님이 거주하시게 될 2층 주거공간. 층고를 높이고 바닥은 평편하게 구성해 부모 세대가 쓰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했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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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집의 외관과 달리 내부는 변화무쌍하다. 가족이 거주하는 3, 4층은 계단을 활용해 반 층씩 올린 스킵플로어(skip floor) 구조로 설계됐는데, 밖에서 볼 때는 2개 층이지만 집 안에선 4개 층의 공간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김 건축가는 "흔히 스킵플로어 구조를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사용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단 다양한 층고를 만들어 공간의 풍요로움을 만들 때 쓰는 방식"이라며 "높이가 다른 양쪽 공간이 한꺼번에 연결되면서 집 전체 분위기와 성격을 자유분방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현관과 접한 3층엔 부엌과 거실, 부부침실이 있고, 반 층 위에는 자녀의 방 2개가 자리한다. 경사가 낮은 넓은 계단으로 연결된 반 층 위 공간엔 작은 거실이 있고, 그 공간은 다시 반 층 위의 옥상과 연결된다. '반 층씩 움직이는 집'에 대한 만족도는 설계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해외 유학을 한 동한씨는 한국식 아파트 구조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던 터였다. "먼저 받아 본 평면적인 설계와는 확실히 달랐어요. 우리 집만의 개성이 확실하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아요. 집에서의 일상은 루틴하게 흘러가지만 공간이 늘 새롭게 바뀌는 묘미가 있어요."

계단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보니 집의 하이라이트는 자녀들이 '계단놀이터'라고 이름 붙인 계단실이 됐다. "위험할까 봐 걱정했는데 아이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라는 설명대로다. 공간을 잇는 역동적인 동선, 벽과 천장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 따뜻한 나무의 물성과 아늑한 공간감까지, 동심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를 갖췄다. "공간의 효용을 따지면서 설계를 하지만 때로는 그 속에 머무르며 사는 사람이 공간의 쓰임을 찾기도 합니다. 이 집에선 계단이 그래요. 공간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머무는 사람이 공간의 매력을 스스로 찾아서 누리니 설계자로서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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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 층에 달하는 층고의 거실에 커다란 창을 설치해 바깥 풍경을 들였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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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몸에 자연이 스미기를"...집이 만드는 열린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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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주차장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비워냈다. 길과 공원 사이 비워진 공간은 누구나 지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이 됐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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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을 즐기던 남편은 집을 짓고 난 뒤 더 이상 길에서 시간을 보내기 싫어 옥상에 텐트를 쳤다. 고개를 젖히면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호젓한 아지트에서 시간을 보내며 영감을 잔뜩 얻고 있다고. 그는 "늘 가족, 자연과 함께 하고픈 욕망이 있었는데 집 덕분에 갈망이 많이 해소됐다"고 했다. 하염없이 망중한을 즐기고 싶은 집에서 가족들이 누렸으면 하는 것도 그런 것들이다. "저 못지않게 아이들도 큰 변화를 맞고 있어요.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주변을 감각하면서 자랐으면 좋겠어요. 봄이면 나무와 풀이 우거진 창틀의 풍경을 즐기고, 겨울엔 옥상에서 눈밭에 뒹굴면서 행복한 집이 몸에 스몄으면 합니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뭐든 잘 시작하고 꾸준히 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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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방 사이에 놓인 화장실. 천장을 설치해 종일 온화한 빛이 일렁인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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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시선은 차단하면서 빛을 들인 반투명한 벽면. 건축가는 이를 숨구멍이라고 표현했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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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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