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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진화, 매끈한 성공담 아닌 너덜너덜 실패기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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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가젤을 사냥하기 위해 쫓고 있는 치타의 모습. 두 종이 달리기 능력을 진화시키는 과정은 낭비로 귀결되는 ‘군비경쟁’을 연상케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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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
불완전한 진화 아래 숨겨진 놀라운 자연의 질서
앤디 돕슨 지음, 정미진 옮김 l 포레스트북스 l 2만2000원



오늘날 과학자들은 “진화는 불완전하다”고 역설한다. ‘적응’이란 진화의 메커니즘을, 이전보다 더 낫거나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것으로 인식해버리는 인간중심적인 오해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앤디 돕슨의 ‘고래는 물에서 숨 쉬지 않는다’는 이런 오해를 산산히 깨버리는 책이다. 지은이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진화 메커니즘을 한층 더 깊이 탐사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은 진화의 함정, 커다란 장벽, 사각지대, 절충안, 타협, 실패작에 관한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진화는 유전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45억년 전 ‘원시수프’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가 나타났고, 복제는 늘 완벽하지 않았기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계통들이 생겨나 급기야 계통 간 경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복제자’는 성공적인 복제를 위해 점차 정교한 ‘생존 기계’(유기체)에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몰리게 됐는데, 이는 종과 종 사이, 개체와 개체 사이, 종과 개체 사이, 유전자와 개체 사이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맞물리는 배경이 된다.



치타와 가젤은 언뜻 서로 속도를 겨루며 진화해온 듯하지만, 실제 경쟁은 먹이를 더 많이 차지하려는 치타들, 서로 먼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가젤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부모 세대의 가젤이 빨랐기 때문에 지금 세대의 치타가 빠른 것이다. 두 종이 마주치면 가젤이 일반적으로 승리를 거두는데, 이는 한끼를 놓칠 뿐인 치타보다 목숨을 내놔야 하는 가젤이 받는 압력(‘적응도 비용’)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이들이 벌여온 ‘군비 경쟁’의 결과는 자못 허탈하다. 오늘날 시속 130㎞로 뛰게 된 치타와 가젤이 과거 110㎞로 뛰던 조상들에 견줘 누릴 수 있는 이득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군비 경쟁은 아예 한쪽으로만 치우치기도 한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탁란’을 하는데, 숙주가 된 새들은 대체로 뻐꾸기의 알과 새끼를 알아보는 능력이 없어 당하기만 한다. 그에 걸맞게 진화하기엔 ‘적응도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군비 경쟁은 때론 자기파괴적이다. 독성이 강한 병원체는 자연 선택에 의해 그 독성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는데, 이는 적정선을 넘어 병원체가 서식해야 할 숙주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코알라는 질긴 나뭇잎을 분해하기 위해 강한 이빨을 갖게 됐으나, 두 번째 이빨들이 다 닳으면 새 이빨이 나지 않아 서서히 굶어 죽는다. 여기서 ‘왜 노화를 막는 진화의 메커니즘은 작동하지 않는가’ 묻는 것은, 개체는 유전자의 증식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핵심을 놓친 인간중심적 접근이다. 스스로 노예가 되거나 자신을 희생하는 등 개미·벌 같은 생물들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개체의 번식 야망보다 집단 전체의 적응도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임신한 쥐가 낯선 수컷의 냄새에 노출되면 자발적으로 유산하는 등 ‘악의’ 행위 역시 궁극적으론 같은 원리를 따른다.



“자연 선택은 계획이 없고, 앞을 내다보지 않으며, 최종 목적지가 막다른 골목일지라도 유기체의 유전자에 즉각적인 이득만 안겨준다면 해당 형질에 보상한다.” 곧 “진화는 목적이 없고, 수동적이며, 비도덕적이다.” 그렇다면 종으로서 인간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지은이는 묻는다. 유일한 생명 유지 수단(지구)을 파괴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 강한 독성으로 숙주 자체를 없애고 마는 병원체의 실패와 닮지 않았는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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