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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기자수첩] 서민금융 외면하는 저축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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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어려운 분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서민금융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지난 3월 21일 오화경 저축은행중앙회장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을 이렇게 맺었다. 모두발언의 주된 내용은 지난해 한 해 실적 설명이었으나 오 회장은 ‘서민금융’으로서 저축은행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저축은행은 1970년대 첫 출범부터 ‘서민을 위한 금융’이란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저축은행은 중저신용자와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최근 저축은행업계를 살펴보면 서민금융 지킴이라는 본분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의문이다. 올해 3월 말 기준 전국 79개 저축은행 여신 잔액은 101조3777억원이다. 저축은행의 여신 규모는 지난해 1월부터 연이어 감소해 2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4년 만에 100조원대 벽도 무너질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는 “건전성 제고를 위해 전체 대출 규모를 줄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여신 감소는 선별적이다. 저축은행이 대기업에 빌려준 대출 규모는 2022년 말 2조7891억원에서 2023년 말 2조9724억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개인사업자 대출은 20% 넘게 줄었다. 대기업 앞에서 저축은행 금고가 열릴 동안 불경기 속 서민 앞에 놓인 기준은 더욱 엄격해졌다.

일부 업체들은 “우리는 잘하는데 소형 저축은행이 대출을 내주지 않아 업권 전체 여신 규모가 줄어든다”고 하소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난해 말 기준 개인신용대출 규모가 1억원 미만인 곳은 37곳에 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에선 “오너가 경영하는 소형 저축은행 중 일부는 회사 셔터를 내린 채 개인 금고처럼 쓰인다”는 소문까지 돈다.

그러나 업계를 대변하는 저축은행중앙회도 서민금융 확대를 뒷전으로 미루긴 마찬가지다. 지난 실적발표 기자회견 중 “최근 대출 규모를 줄이는 등 서민금융을 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오 회장은 “햇살론 등 정책 자금을 받아서 금리를 운영할 수 있는 분야는 꾸준히 늘려왔다”며 “중금리 상품 취급은 기준금리가 내려가면 늘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중앙회도 서민금융 역할 수행을 외부 환경에 맡겨버린 셈이다.

저축은행이 돈줄을 옥죄면 중저신용자들의 삶은 팍팍해진다. 저축은행이 대출 문턱을 높이는 동안 고금리 카드론 이용자는 연일 늘어나는 중이다. 불법 사금융으로 인한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 저축은행이 서민금융 타이틀을 지키고 싶다면 서민들이 정말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정부가 푸는 돈에, 시장 환경에 기대 가끔 구휼(救恤) 행세만 하는 저축은행은 서민에게 필요하지 않다.

김태호 기자(te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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