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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강성학 칼럼] 평등(equality)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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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눈이 없느냐? 유대인은 손, 오장육부, 감각, 애정, 열정이 없느냐? 유대인도 기독교인과 같이 똑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로 상처받으며, 같은 질병에 걸리고 같은 방법으로 치유되며, 똑같이 겨울에 추위를 느끼고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느냐?"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는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절규였다. 여기서 샤일록이 인간의 본질적 평등을 설명할 때 그는 인간의 육체의 평등만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영혼, 즉 인격의 불평등을 알지 못했다. 샤일록이 자신을 괴롭히는 기독교인들과 평등을 주장하는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슬프게도 오직 육체적 조건에 속하는 것들만을 열거했다. 그가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에 발견한 공통점은 본질적으로 모든 동물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샤일록은 인간의 보편성에 호소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당화했다. 인간들은 상호 그들의 닮은 것을 인식했을 때 함께 인간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에게 다른 족속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들의 유사성은 그들의 보복심에 있다. 슬프게도 샤일록에게 유일하게 정신적인 것은 보복이다. 소피스트 안티폰(Antiphon)의 경우처럼 샤일록에게 인간의 공통분모는 정말로 아주 낮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체이다. 영혼의 보다 높은 것들이 빠져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가에 대한 미덕과 악덕에 관한 인간들의 의견이자 믿음이 빠져 있다. 인간들은 이것들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인간들을 상호 적으로 만든다. 샤일록은 모든 인간들이 인정하는 하나의 본성에 호소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고결한 인간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할 것들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평등은 인간사회의 본질적인 것이다. 이미 기원전 그리스 시대 아테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불평등한 인간은 평등을 추구하고 평등한 인간은 불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에게는 평등의 추구가 정의였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의 이러한 간과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아니라 플라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트텔레스에게 정의가 분배의 비례에 있었다면 플라톤에게 정의란 평등이 아니라 시민 각자의 인격적 완성이었다. 셰익스피어가 벗어나고 있던 중세는 철저히 신분에 입각한 봉건사회였지만 기독교인들은 "신 앞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신은 끝내 그것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반면에 셰익스피어보다 약간 뒤 시대에 살았기에 셰익스피어를 읽었을 인물이었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셰익스피어가 샤일록의 입을 통해 설파한 인간의 동물적 공통점인 육체의 안전, 즉 생명의 보존을 자신의 위대한 정치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결국 알고 보면 모두가 죽음 앞에 평등하다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서양 정치사상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이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생명의 보존을 확보할 능력의 부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에서 평등한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레바이어탄(Leviathan)이라는 제3자의 무서운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 삶은 "고독하고, 빈곤하고, 치사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행하게 평등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죽음으로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심리에서도 평등한 것이다. 그리하여 홉스는 생명의 보전을 위한 인간의 자연권(the natural right)을 천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정치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제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을 지켜줄 국가를 수립하고 그 국가의 법 앞에 평등하게 되었다. 마침내 샤일록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단 국가가 수립되자 인간들은 로크가 주장하듯 단순히 생명뿐만아니라 자유와 행복을 위한 재산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경쟁사회로 진화했다. 그리고 국가는 그런 경쟁, 특히 경제적 경쟁의 자유를 보장해야 했다. 그 결과 시민사회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았으며 그에 따른 비열하고 끝없는 허영심이 지배하는 불평등한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를 규탄하고 나선 것이 루소였다. 홉스의 자연상태가 루소에게는 오히려 시민사회의 현실이 되었다. 다만 시민사회와 그 속에서 인간들 간의 관계가 평화적 수단의 전쟁을 오직 확장한 것이 되었다. 이제 목숨을 건 투쟁 대신에 여러 가지의 경쟁과 착취, 특히 주로 경제적인 경쟁과 착취로 대체되어 버렸다. 주된 관계는 개인들 간의 계약이다. 루소는 자연상태에서의 평등을 상실하고 시민사회에서 직면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자연상태의 평등한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는 버크(Burke)처럼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 재건의 기회를 모색했다. 새로운 사회계약이 바로 그것을 위한 그의 프로젝트였다. 루소는 샤일록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루소는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일반의지의 평등한 사회의 수립을 주장했다. 그에게는 기존의 모든 사회가 유산자들의 사기 계약에 의해서 수립된 부당한 국가 사회였다. 따라서 새로운 정당한 국가의 수립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근대 최초의 정치적 혁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확보하기 어려운 "일반의지"의 창조를 한 사람의 위대한 입법자에게 위임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근대 독재체제의 문을 열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 후 모든 혁명의 이론적 아버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적 독재자들을 일반의지의 입법가로 정당화해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소는 여기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의 문을 슬그머니 열어버렸다. 그 결과 루소는 나폴레옹을 매혹시켰으며 로베스피에르를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훗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 그 후예의 혁명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근대의 독재자들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아주 엉뚱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들은 인간들의 격차를 줄이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모든 인민들의 삶을 획일화(uniformity)하여 불평등의 문제를 일거에 제거하려고 했다. 즉 그들은 획일적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강요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다원적 사회로 발전해 가는 반면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전과 억압을 통해 모든 인민들을 새로운 획일적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물질적 평등을 해소하는 경제활동, 즉 생산과 분배를 획일화하려고 했다. 즉 그들은 육체적 조건을 획일화하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니체의 '선과 악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겠다는 '초인,' 그의 후예인 하이데거의 파시스트, 그리고 역시 니체의 영향을 받은 베버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사로잡힌 전체주의자들은 새로운 문명과 질서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인민들을 모두 새로운 파시스트 인간으로 획일화하려 했다. 그들도 역시 선전과 억압을 통해 심리적 세뇌(regimentation)작업, 혹은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가스라이팅으로 인민들의 의식을 획일화하여 인간 영혼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루소가 참다운 교육을 통해 성서적 타락 이전의 새로운 고결한 아담(Adam)으로 에밀(Emile)을 창조하려 했듯이 새로운 '공산주의 인간'과 새로운 '파시스트 인간'을 창조하려 했다. 그러나 20세기 두 전체주의 세계는 그 프로젝트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아주 다른 것들을 동일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타인보다 우월하고 싶은, 즉 더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본능적 저항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파시스트들은 개별 인간들의 상이한 자유의지, 즉 영혼을 억압하는 데 실패했다.

그동안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1929년 경제적 대공황 사태 이후 그때까지 유지해 온 '기회의 균등'이라는 정의의 개념을 보완하여 모든 인민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근대복지국가의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1970년대에 와서는 소위 존 롤즈(John Rawls)의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는 공정으로서 사회정의론이 등장하여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롤즈의 사회정의론은 사실상 전체주의 사회의 평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국가의 추구가 대세가 되었다. 이처럼 자유 민주주의 사회는 불평등을 줄이는 방식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했던 반면에 획일적 평등을 강요했던 공산주의나 파시스트 정권은 오히려 불평등한 자유 민주주의를 원했던 인민들에 의해서 1990년대 대부분 전복되고 말았다. 인간들은 20세기 말에 마침내 전체주의적 획일화를 거부하고 평등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한 자유로운 사회를 선택했다. 이것은 20세기의 인간들이 발견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진실이다.

19세기 초반 알렉시스 토크빌은 이미 민주주의가 발전된 사회에서 인간들은 자유보다는 평등을 선호한다고 경고했다. 인간이란 평등감을 얻기 위해서 자유에 필요한 제도들과 법률들을 기꺼이 뒤집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정말로 육체와 영혼의 조건에서 모두가 평등을 원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시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 "평등한 자는 불평등을 원하고 불평등한 자는 평등을 원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반복과정이다. 루소는 이 빈부 간의 계급투쟁을 인간이 맨 먼저 경험하는 추악한 열정이라고 주장했다. 샤일록의 항변처럼 모든 인간은 육체적 조건에서 평등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결코 평등해질 수 없다. 여기서 인간의 영혼을 각 인간 개인의 인격이라고 바꾸어 쓴다면 이런 사실은 보다 선명히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솔직하게 인간은 인격적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으며 또한 영원히 평등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월한 영혼의 소유자, 즉 고결한 인격자는 참으로 존경스럽고 아름답지 않은가?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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