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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3 (목)

지어야 잇는다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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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원 평창군 미탄면 기화리 용소골의 비탈진 밭에서 농부가 호리소와 함께 봄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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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기껏해야 자급 수준이나마 농사를 지어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인지 알았다. 농사는 우선 땅심부터 돋워야 하는 일. 올해 농사도 올 봄부터가 아니라 지난해의 씨앗 갈무리부터가 시작이다. 어떤 씨앗은 일일이 심고, 어떤 씨앗은 흩뿌리고, 어떤 씨앗은 모종을 내서 옮겨 심어야 한다. 어떤 작물은 골을 타서 이랑을 만들고 어떤 작물은 두둑을 높이 쌓아야 한다. 심고 나면 마음을 졸이며 기다려야 한다. 같은 날 같은 밭에 심었어도 어떤 씨앗은 빨리 나고, 어떤 씨앗은 늦게 나고 또 어떤 씨앗은 끝내 싹을 내밀지 않는다. 수시로 무섭게 퍼지는 풀을 뽑아줘야 하고, 병충해에도 대비해야 한다. 하늘을 바라 날씨에 마음을 졸이기도 해야 한다. 시기를 놓쳐선 안 되지만, 너무 서둘러도 안 된다. 아무리 조생종을 심어도 때가 돼야 거둔다. 한해든 한철이든 그 작물의 생애에 사람의 몸을 맡겨야 먹거나 돈과 바꿀 수 있는 게 농사다.



농사만큼은 아니라도 밥 짓기 역시 정성을 들이고 세심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일이다. 불리고 씻어 밥물 잡아 앉히고, 먹을 사람의 입맛에 따라 적당히 익히고, 뜸을 들이고. 내 시어머니는 육십년째 365일 매일 하는 일이어도 어떤 날은 질고 어떤 날은 된 게 밥이라고 하신다. 옷도, 집도, 약도 짓는다. 이렇듯 ‘짓다’라는 동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얻어야 하는 것에 대한 존중을 담은 말이 아닐까? 말 그대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살림’에 쓰는 단어로써 말이다.



또한, 짓기는 혼자 지었더라도 혼자 해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며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니까. 농부가 작물의 상태와 날씨의 흐름에 민감해야 하듯이, 밥 짓는 사람이 햅쌀이냐 묵은쌀이냐 백미냐 잡곡밥이냐에 따라 밥물을 맞추고 불을 조절하며, 목수가 나무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대패와 톱날을 맡기듯이.



그뿐 아니라 짓기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의존으로 산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이다. 농부들은 서로 씨앗을 나누고, 농기계를 빌리며 품앗이로 농사를 짓고, 벼농사를 지은 농부 덕분에 누군가는 밥을 짓는다. 밥이든 옷이든 집이든 무엇이든 손수 지어본 사람이어야 그 일의 가치와 힘겨움을 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남의 노동을 함부로 후려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농산물 비싸단 소리를 함부로 못 하고, 옷을 지어본 사람은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마시는 먼지의 위험을 안다.



그러나 현대인은 더는 자기 손으로 직접 짓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한때는 누구나 하던 일이고,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거의 모든 짓는 일을 기계들에 시키거나 외주화한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존중은 없다. 마음 졸이며 때를 기다려 얻지 않은 것들은 쉽게 쓰고 쉽게 버려진다. 그와 함께 우리는 자연과 관계 맺는 법을 잊어버렸고, 내 모든 일상을 의존하는 타인의 존재마저 잊어버렸다. 덕분에 몸으로 하는 모든 짓는 일이 비천한 노동이 되었다. 자식에게 농사를 권하는 부모는 흔치 않다. 짓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농사꾼, 밥순이, 노가다 등으로 비하된다.



이로써 짓기로 이어지던 모든 관계도 끊어져 버렸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은 짝도 짓고 무리도 지어야 사는데, 사람들은 이제 짝도 무리도 짓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역대급 저출생의 시대, 각자도생의 시대를 산다. 정말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누구나 기댈 수 있는 나라,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인 나라를 꿈꾸었던 진보정치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생각한다. 정성을 들여 지어야 잇는다. 정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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