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3 (목)

[단독] 의정협의 시작부터 파국까지…의협 내부 보고문건 입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367일간 27차례 의정협의 진행상황 기록

정부 증원수요 조사하자 협상단 강경파 교체

의대 증원 규모는 회의서 거론된 적 없어

서울고등법원이 정부에 지정한 의대 증원 회의록 제출일인 10일이 지나갔다. 의대 증원과 관련한 정부의 3개 회의 중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가 27차례 진행한 의료현안협의체 회의는 양측 합의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아, 정부는 관련 브리핑 자료만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회의 내용은 베일에 싸여있다.

아시아경제

대한의사협회가 내부 보고용으로 작성한 의료현안협의체 운영현황 문건 첫 페이지.


아시아경제는 이 회의와 관련한 의협 내부 보고 문건인 '의료현안협의체 운영현황'을 입수했다. 이 문건은 지난 2월14일 작성됐다. 총 19쪽 분량으로 367일 동안 27차례 열린 회의의 주요 내용이 시간순으로 요약돼있다. 문건에 따르면 27차례 회의 중 의대 정원을 몇 명 늘리자는 언급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문건에 기록된 의정협의 초기 분위기는 크게 나쁘진 않았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양측은 지난해 1월30일 열린 첫 회의에서 '필수의료 강화 및 의료체계 개선'을 목표로 다각적인 과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대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검토하는 등 핵심 과제들을 협의체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2~3차 회의에서 ▲비대면 진료 ▲필수·지역의료 강화 ▲병상 대책 등 의료체계 개선방안 ▲의대교육 정상화 및 근무환경 개선방안 등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이견은 같은 해 3월22일 열린 4차 회의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복지부는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강화 방안으로 ▲필수의료 강화 및 지역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한 필수의료 인력 재배치 ▲효율적 활용 및 양성 등을 제안했다. 반면 의협은 ▲(가칭)필수의료 사고처리 특례법’ 제정 ▲수도권 대학병원 분원 개설 제한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때부터 정부와 의료계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한다.

이 기간 의료계 협상단은 '지역 의료생태계를 파괴하는 수도권 대학병원 분원설립 차단'을 3~5차 회의에서 3차례 연속으로 주장했다. 6차 회의 기록에서 '법적·제도적 대책 마련을 위해 상호 협조 및 노력키로 함'이란 문구가 나타나, 이 이슈에서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이견을 좁힌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의 수도권 대학병원 분원 금지 주장은 이후에도 같은 해 12월 22차 회의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현재 서울 위성도시 등 수도권 여러 지역에서 대학병원이 분원을 짓고 있으며, 각 분원의 규모를 합치면 6600병상이다. 의료계는 이들이 동네 의원 등 현지 1차의료기관 환자를 흡수할 것으로 우려하며, 일각에서는 정부가 증원하는 의대생 2000명이 수도권 신설 대학병원 개원 후 공급할 저임금 전공의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지부는 4월20일 열린 7차 회의부터 조금씩 의대 증원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의협 정기대의원총회에서 필수의료인력 확충에 대한 기본원칙 및 합리적 방향에 대한 논의를 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이어진 8차 회의에서도 지역·필수의료를 위해선 의료인력 양성 및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시아경제

이형훈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왼쪽 두번째)이 지난해 2월9일 서울 중구 컨퍼런스 하우스 달개비에서 열린 '제2차 의료현안협의체'에 참석,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윤동주 기자 doso7@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0차 회의에서 의료계는 의대 증원보다는 지역·필수의료에 의료인력이 자발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마련하는 등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복지부는 의료계 의견에 동의한다면서도, "과학적 근거에 기반해 적정하게 검토 확충된 의사인력이 필수·지역의료로 유입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자"고 의협에 역제안했다. 의대 입학정원을 늘리겠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열 차례 회의가 진행된 후, 의협은 불만족한 반응을 보였다. 6월15일 열린 11차 회의에서 그간 제안했던 사안들에 대한 피드백을 복지부에 요청한 것이다. 이에 복지부는 의협 제안 사항에 대한 검토상황 및 향후 계획 등을 밝혔다.

같은 달 말로 예정된 12차 회의를 앞두고 의정 갈등이 격화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이 회의를 이틀 앞두고 의대 정원 문제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산하 분과위원회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의협은 9·4 의정합의를 바탕으로 의대 정원 논의를 하자며 곧장 문제를 제기했다. 앞서 정부와 의협은 지난 2020년 의대 정원 확대 문제는 의정협의체에서 논의하기로 9·4 의정합의를 맺은 바 있다. 이에 복지부는 "의대 정원 문제에 대해서는 협의체 의협과 충실히 논의해 나가겠다"면서도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수요자 및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의견수렴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그러자 의료계는 강경 투쟁을 시사했다. 9월21일 열린 14차 회의에서 의협은 "의사 인력 양성에 대한 논의는 보정심이 아닌 협의체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재차 전달했다. 하지만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달인 10월15일 국민의힘·정부·대통령실은 국무총리공관에서 비공개 고위당정협의를 열고 '의료 서비스 접근성 제고 방안'을 논의했다. 당정협의에서 의대 정원을 1000명 늘리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대통령실은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이틀 뒤 의협은 10월17일 '의대 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대표자 회의'를 개최한다. 의협은 '의료계 대표자 결의문'을 통해 ▲9·4 의정합의 성실 이행 ▲필수·지역의료 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의료계 의견 경청 등을 요구하며 정부가 의대 증원을 강행할 경우 투쟁을 포함해 강력히 저항할 것이라고 밝힌다.
아시아경제

대한의사협회가 지난해 10월17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에서 연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에서 이필수 전 의협 회장이 인사말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달 26일 열린 15차 회의에서 의대 정원 확대는 필수의료 인력배치·양성과 근무환경 개선 등을 위한 방안 중 하나로 거론했다. 이 회의에서 복지부는 "의대정원 확대는 필수·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의대정원 확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정부는 회의 다음 날인 10월27일 의대의 현장 수요와 수용 가능성, 의료 인프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40개 의과대학 대상으로 증원 수요와 학생 수용 역량 조사를 벌였다.

이후 협의체 구성에 큰 변화가 생긴다. 의협 대의원회가 11월3일 "의료계 협상단을 개편하고, 정부와 적극 협의에 나서라"는 권고를 발표한 것이다. 의협 관계자에 따르면 이 권고는 회의가 복지부의 의도대로 진행된다는 의협 내부 비판에 따라 더 강경한 인물을 내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특히, 전달인 10월26일 정부가 의료현안협의체를 거치지 않고 전국의 의대 정원 확대 수요조사를 벌인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의협 관계자는 전했다.

이에 양동호 광주광역시의사회 대의원회 의장을 새 단장으로 한 제2기 의협 협의체 협상단이 새로 구성됐다. 양 의장은 2022년 '간호단독법 저지 2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의협에서 2기 협상단이 처음 참석한 11월15일 17차 회의에서 양측은 ▲적정보상 ▲의료전달체계 확립 ▲인력시스템 개선 등 향후 협의체 회의에서 논의할 중점과제를 선정한다. 큰 틀에서 의협은 필수·지역의료 정상화를 위해 적정보상 등 근본적 대책 마련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복지부는 적정보상과 법적 부담 완화뿐 아니라 의사 인력 확충 방안에 대해서도 의협이 논의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시아경제

이필수 전 대한의사협회장이 지난해 11월26일 서울 용산구 의협 회관에서 열린 의대정원 확대 대응방안 논의를 위한 전국의사대표자 및 확대임원 연석회의에서 삭발하고 있다.[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달 21일 복지부는 의대정원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40개 의과대학에서 제시한 2025학년도 증원 수요는 최소 2151명에서 최대 2847명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조사 결과와 함께 "의사인력 확대와 함께 지역·필수의료 생태계 조성을 위한 정책 패키지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한다. 올 2월1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의료개혁 민생토론회'에서 발표된 '4대 필수의료 패키지'가 이것이다.

의협은 복지부의 의대정원 수요조사 발표가 나온 당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의협은 "이해 당사자들의 희망 사항만을 담은 정부의 이번 의대정원 수요조사를 졸속·부실·불공정 조사로 규정하고, 비과학적 조사 결과를 의대정원 확대의 근거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여론몰이를 강력 규탄한다"며 "정부가 지금처럼 과학적 근거 및 의료계와의 충분한 소통 없이 의대정원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경우 의협은 의료계 총파업 등 강력한 강경투쟁에 나설 것"을 공표했다.

정부의 행보에 의협도 점차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기자회견 다음 날 열린 18차 회의에서도 의협 측은 유감을 표명하고 양 전 단장의 모두발언 후 협상단 전원이 퇴장했다. 사흘 뒤엔 의대증원 정책 대응을 위한 '전국의사대표자 및 확대 임원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의협은 집행부 산하에 비상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14만 의사와 2만 의대·의전원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강력 대응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회의에선 유사한 논의가 반복됐다. 의협은 "정부가 요구하는 의대정원 논의는 적정인력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적정보상 및 법적 책임 완화 등 필수·지역의료 분야로의 유입방안이 마련한 후 논의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반면 복지부는 "정부에서 진행한 수요조사는 단순 기초조사로 해당 결과가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다"며, "적정 의대 정원에 대해 의협과 정부에서 제시하는 과학적인 기준과 근거를 상호 검토하여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의대 정원 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지 않다"고도 말했다.

아시아경제

양동호 의협 측 협상단장(광주광역시의사회 대의원회 의장)이 지난 2월6일 오전 10시10분 서울 중구 비즈허브 서울센터에서 열린 제28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에서 입장문을 낭독하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peaceful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대 증원 방안을 두고 평행선이 이어지자 복지부는 올 1월15일 의협에 공문을 보내 의대 입학정원 관련 의견 제출을 요청한다. 이에 의협은 "의대정원 정책에 대해선 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의와 검토를 이어가고 있다"며 "공문을 통해 증원 규모에 대한 의견을 별도 요청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판단된다"고 답했다. 이어 같은 달 17일 열린 25차 회의부터 마지막 회의인 30일 회의에서도 양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협의체는 파국으로 끝났다. 정부는 지난 2월5일 의협 측에 예정에 없던 다음 날 회의 개최를 요청했다. 이에 의협 측 양 단장은 6일 오전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오늘은 회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입장을 전달하러 왔다"며 "정부는 오늘 협의체에 의대 정원 확대 인원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려 하고, 오후에 예정된 보정심에서 의대 정원 확대 안건을 상정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후 퇴장했다.

양 단장은 입장 발표 후 취재진에게 "의정 협상은 잠정 중단할 것"이라며 "정부가 일방적인 소통 형식을 버린다면 의정 협상을 재개할 준비는 돼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협의체 회의는 이후 재개되지 못했다. 정부는 이날 오후 정부 서울청사에서 보정심을 열고 2025학년도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했고, 의협 지도부는 이 발표 내용을 서울 동부이촌동 의협회관에서 TV 중계방송으로 접했다. 2주일 뒤인 2월20일 전공의 1만여명이 동시에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의료공백 사태가 시작됐다.

최태원 기자 peaceful1@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