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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중앙시평] 허송세월하기엔 너무 길고 소중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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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


대통령 권력이 막강하다고들 하지만 실상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그렇다. 우리나라의 경우 웬만한 정책은 모두 입법과정을 거친다. 과거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화되어 있을 때는 입법과정이 정부가 일하는 데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정책사항도 오히려 입법화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했다. 그래야 예산편성 때 자동적으로 해당 정책 관련 예산이 포함돼 예산확보가 용이한 면도 있었다. 청와대에 종속적인 여당과의 당정 협의를 통한 입법과정이 수월했고, 야당을 회유·겁박할 수단들도 가지고 있었다. 국회의 동의를 거치는 형식이 국회를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수 있었으므로 대통령령으로 할 수 있는 웬만한 정책추진도 입법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압도적 여소야대 국정 정체 우려

현 정치구조상 여야 협치 불가능

정책토론 장 넓히고 탈이념 필요

남은 임기 새 국정 시스템 모색을

1987년 민주화는 정부의 정책추진 환경에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언론, 노조, 시민사회 활동의 자유가 확대되고 국회의 권능도 확대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김영삼, 김종필 야당과 합당을 추진해 다수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화 시대의 정책환경을 극복해 나가려 했다. 어찌 보면 협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런대로 정책변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고, 전환기를 무난히 치러냈다. 그 이면에는 재벌 대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막대한 통치자금이라는 무기도 있었다. 박정희 정부 시대부터 내려온 이 통치수단은 대통령이 여당 총재로서 당 운영비와 선거자금을 지원하며 당의 인사와 공천을 장악하고, 군부세력, 야당과 비판세력, 나아가 여론을 관리하고, 관료들의 충성을 확보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여기에 대통령은 안기부(현 국정원), 보안사, 검찰, 경찰, 국세청 같은 권력기관을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관치금융 역시 기업들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정치기반을 무너뜨렸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서 금융시장이 개방·자유화되고, 기업회계 투명성이 강화되었으며, 대폭적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거치며 대기업들의 대출의존도가 낮아졌다. 정부의 대출 지원보다 자본시장의 평가가 더 중요해지면서 정경유착의 기반이 무너지게 되었다. 금융실명제 도입과 더불어 돈의 흐름이 많이 투명해졌고, 청와대는 정치자금을 거둬들이기 어려워졌다. 노무현 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권력기관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통치를 위한 회유와 협박 수단마저 놓아버렸다. 그 결과 헌법상 명기된 국회의 권한이 오롯이 살아나며 국회의 실질적 권능이 막강해졌고, 검찰은 스스로 권력화하였으며, 언론은 관전석에서 경기장으로 자주 뛰어들면서 정부가 추진하려는 정책은 쉽게 실종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여당이 다수당이 된 경우에도 당정협조가 원활치 못한 경우가 많았으며, 대통령은 결국 여당 중진들을 다수 입각시킴으로써 당의 협조를 얻어 국정을 운영하려는 내각제의 성격을 빌리게 되었다.

1987년 우리 국민은 원하던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으나,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어떻게 생산적으로 국가정책을 결정하며 국가발전을 이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합리적 토론, 존중, 타협의 문화도 체득하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번영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60~80년대의 독재정권 하에서였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변화된 정치환경 하에서 어떻게 하면 국가에 필요한 개혁과 혁신을 이루며 국가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모색해야 한다. 정부수립 당시 맹목적으로 서구의 제도를 모방, 도입하였으나, 그것이 우리에게 잘 맞지 않아 독재와 편법, 탈법을 일상화하며 국가를 운영해 왔다. 투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효율적이었기에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이제는 투명하면서도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국가발전은 여기서 정체하게 될 것이다.

여소야대 하 윤석열 정부의 남은 3년은 허송세월하기에는 너무 길고 중요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정치구조에서 여야 협치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별 사안과 정책에 대해서는 타협과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가 정책의 이념적 색채를 줄이고, 정책 준비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 채널을 넓혀야 한다. 이쪽저쪽 나누지 말고 형식이야 어떻든 전문가들을 모아 자문회의 같은 것을 구성하고, 대통령은 이를 경청하며 정책 방향을 모색해 나가면 야당과의 타협과 협력 공간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권력구조, 정부조직, 고위직 인사제도, 인센티브 시스템을 재구성하기 위한 공론의 장을 세우고, 이의 준비 기간으로 보낸다면 가치 있는 3년이 될 것이다. 여야 전직 대통령, 국회의장, 총리들의 경험과 원로들의 지혜를 모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대폭적 국가 운영 시스템의 리모델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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