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비상금' 외환보유액, 국가신인도 평가 지표로 사용
외환위기 때 외환보유액 332억 달러→39억 달러 급감
韓외환보유액 세계 9위 수준…"3000억 달러대 진입은 위험요인"
외환당국이 달러당 원화 급락을 방어하기 위해 시장에 달러를 풀면서 외환보유액이 한 달 새 60억 달러 급감했다. 지난해 10월 이후 가장 적은 수준까지 떨어진 것이다. 6개월 만의 최저 보유량(4132억 달러)에 일각에선 외환시장 안전판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한국은행은 외부충격에 대응할 충분한 실탄을 확보하고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했다.
실제 외환보유액 부족으로 경제 위기를 맞은 1997년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면 현재의 외환보유액은 당장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다만 3000억 달러대로 하락할 경우 환투기를 유발할 수 있어 현재 수준이 결코 넉넉한 것은 아니라는 우려도 나온다.
8일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132억6000만 달러로 전월 말 대비 59억9000만 달러 축소됐다. 한은은 외환보유액이 증가한 요인으로 미국 달러화 약세에 따른 기타통화표시 외화자산의 달러화 환산액 감소, 금융기관의 외화예수금 감소 등을 꼽았다.
외환보유액은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국제수지 불균형이나 외환시장이 불안정할 경우 사용할 수 있는 대외지급준비자산이다.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외화 비상금으로 볼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비(非) 기축통화국에서는 외환보유액이 국가의 지급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로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외환보유액이 적을 경우 국가신인도는 타격을 입게 된다. 이 경우 외국 자본은 더 빠르게 이탈하고 1997년과 같은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도래할 수 있다.
1997년 한국 정부는 누적된 경상수지 적자로 원·달러 환율이 1900원을 넘어서자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액을 크게 소진했다. 당시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은 286.1%로 1년 안에 갚아야 할 외화 빚이 보유한 외화보다 3배 가까이 많기도 했다.
직전 해에 332억 달러였던 외환보유액은 빠른 속도로 소진돼 1997년 12월 39억4000만 달러까지 떨어지면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 이후 외국 자본이 더 빠르게 이탈함에 따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은 점진적으로 외환보유액 규모를 늘려왔다. 2001년 9월 1000억 달러 진입을 시작으로 2005년 2000억 달러, 2011년 3000억 달러를 기록했다. 2018년엔 4000억 달러대에 진입하면서 21년 만에 외환보유액을 100배 이상 불렸다. 미국의 긴축 정책이 시작된 2022년부터는 4200억 달러 안팎을 오가고 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현재 세계 9위 규모다. 한은은 수차례 "외부 충격에 대응하는 데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과거 외환위기·금융위기 때와는 달리 적정성 지표가 양호하고 국내경제의 펀더멘탈(기초 체력)이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한은의 입장과 달리 일각에서는 외환보유액의 3000억 달러대 진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 4000억 달러대 턱걸이 수준인 외환보유액이 3000억 달러대로 진입했을 때 시장에 큰 충격을 줄 것이란 분석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 달에 60억 달러 급감했다는 것은 두 달 뒤에는 3000억 달러대로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 경우 외환당국의 실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환투기가 급증해 환율이 오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금은 외환보유액을 큰 폭으로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라 항상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 위험에 노출돼 있다"면서 "한은은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외환위기가 찾아와도 외환보유고 사정이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아주경제=장선아 기자 sunrise@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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