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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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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채 상병 특검법’ 수용해 주십시오” 생존병사들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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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2인, 윤 대통령에 공개서한

“무리한 지시한 사단장, 여단장은 무탈

모든 책임은 부하들 몫···거부 말아달라”

경향신문

해병대예비역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17일 국회 소통관에서 제21대 국회 ‘채상병 특검법’ 처리 촉구 기자회견에 앞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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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채모 상병과 함께 호우피해 실종자 수색 작전에 투입돼 급류에 휩쓸렸다가 생존한 병사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채 상병 특별검사법을 수용해달라”고 호소했다.

군인권센터는 생존 병사 A씨와 B씨가 윤 대통령에게 채 상병 특검법 수용을 촉구하는 취지로 공개 편지를 작성했다고 7일 밝혔다. A씨와 B씨는 편지에서 “채 상병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미안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서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밝혔다.

앞서 국회는 지난 2일 ‘채 상병 특검법’으로 불리는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안’을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주도해 통과시켰다. 그러자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은 곧바로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는 입장을 내고 공수처 수사가 우선이라며 사실상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예고했다.

A씨와 B씨는 편지에서 “2023년 7월19일 아침 우리는 호우피해 실종자를 찾으라는 지시에 따라 하천에 들어갔다”며 “늘 그랬듯 함께 고생하고 다 같이 부대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채 상병은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고 썼다. 이어 “그날 여러 전우는 무방비 상태로 급류에 휩쓸렸고 저마다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사라져가는 채 상병이 보였다”며 “살려달라던 전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미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들은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했으니 채 상병과 부모님의 억울함과 원통함은 나라에서 잘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채 상병의 죽음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썼다. 이어 “무리한 작전을 지시했던 사단장과 여단장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리를 지켰다”면서 “모든 책임은 부하들이 지고, 선처는 사단장이 받았다”고 했다.

경향신문

생존 병사 A씨와 B씨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의 일부. 군인권센터 제공


또 이들은 “채 상병 특검법을 ‘죽음을 이용한 나쁜 정치’라고 표현한 대통령실의 입장을 뉴스로 접했다”면서 “저희마저 채 상병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사고가 발생하고 9개월이 지났다”며 “이만큼 기다렸으면 특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겠나”라고 되물었다.

A씨와 B씨는 “피해 복구를 하러 간 우리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실종자 수색에 투입한 사람, 가만히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급류가 치던 하천에 구명조끼도 없이 들어가게 한 사람, 둑을 내려가 바둑판 모양으로 흩어져 걸어 다니면서 실종자를 찾으라는 어이없는 판단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가”라며 “우리에게, 해병대를 믿고 아들을 맡긴 채 상병 부모님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나라의 당연한 책무”라고 했다.

아래는 공개 편지 전문. 유족 의사에 따라 고 채 상병 이름은 비공개합니다.

윤석열 대통령님께 드립니다.

필승, 저희는 해병대 제1사단 故채○○ 해병의 전우, 예비역 해병 A, B입니다. ○○이와 함께 군 생활을 했고, ○○이를 떠나보낸 후 만기 전역했습니다.

2023년 7월 19일 아침, 저희는 호우 피해 실종자를 찾으라는 지시에 따라 하천에 들어갔습니다. 위험한 작전이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늘 그랬듯 함께 고생하고 다 같이 부대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저희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날, ○○이와 저희 두 사람, 그리고 여러 전우들은 무방비 상태로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저마다 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 사라져가는 ○○이가 보였습니다. 살려달라던 전우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미안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 저희는 ○○이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간부님들, 동기, 후임들 모두 너무 힘들어 보였지만 서로 다독일 뿐, 사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내가 무너지면 다들 무너질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일상을 찾아갔습니다. 조사를 나왔던 군사경찰 수사관님에게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사실대로 얘기했으니 ○○이와 부모님의 억울함과 원통함은 나라에서 잘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 전우인 저희에게 남은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 죽음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질 거라며 눈물을 참던 중대장님은 여단의 다른 보직으로 전출되셨고, 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던 대대장님은 보직해임 되어 떠나셨습니다.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위험하고 무리한 작전을 지시했던 사단장님과 여단장님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뉴스에서는 사단장님이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부하들을 선처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현실은 거꾸로였습니다. 모든 책임은 부하들이 지고, 선처는 사단장님이 받았습니다.

그 뒤로 9개월 동안 ○○이와 저희가 겪었던 끔찍한 일이 매일 뉴스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걱정되어 꺼내지 못했던 ○○이 이야기는, 이제 서로의 안위를 위해 이야기 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말하는 주제였지만, 저희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 분위기가 사나워 다들 쉬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병대를 이끄는 사령관님과 사단을 이끄는 사단장님이 다 엮인 일인데 어떻게 함부로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곧 전역한 저희들은 취업과 복학을 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사고를 같이 겪었던 후임들은 대부분 아직 부대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힘들다고 어디 말할 데조차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그렇듯이, 그 친구들도 죄진 것 없이 죄지은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두 달 뒤면 ○○이 1주기입니다. ○○이를 기리는 자리에 사령관님, 사단장님 같은 분들도 아무렇지 않게 참석하시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그런 자리에 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를 맘껏 그리워하고, 솔직하게 미안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임들은 현역 군인이니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죄진 것 없이 죄지은 마음으로 다녀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 내 대통령님께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대통령님. ‘채 상병 특검법’을 수용해주십시오.

채 상병 특검법을 ‘죽음을 이용한 나쁜 정치’라고 표현한 대통령실의 입장을 뉴스로 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희마저 ○○이의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가 발생하고 벌써 9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이제는 특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피해 복구를 하러 간 우리를 아무 준비도 없이 실종자 수색에 투입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만히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급류가 치던 하천에 구명조끼도 없이 들어가게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둑을 내려가 바둑판 모양으로 흩어져 걸어 다니면서 급류 속에서 실종자를 찾으라는 어이없는 판단을 내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현장과 지휘 계선에 있었던 모두가 누구의 잘못인지 잘 알고 있는데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와 ○○이 모두 내가 나고 자란 나라를 지키고자 남들이 말린 힘든 해병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이런 저희에게, 그리고 해병대를 믿고 하나 뿐인 아들을 맡기신 ○○이 부모님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나라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저희는 정치에 별 관심 없었던 평범한 20대였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이를 놓쳤던 그 때처럼,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미안함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 부탁드립니다.

대통령님.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주십시오.

저희가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부끄럽지 않게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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