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단단하게 맺어질 수도, 조금 더 멀어지기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 석파정 서울미술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빠의 커다란 침대로 기어 들어가면 일단 최악의 공포심은 사라져.”
’안네의 일기’ 속 안네 프랑크의 고백이다. 숨소리조차 두려운 은신처에서도 소녀는 작은 행복을 키웠다. 가족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연결되어 있는 가족을 그려낸 근대의 이중섭과 저만치 멀어진 가족의 거리를 담아낸 현대 작가 류노아의 사연이 궁금하다.





“답장을 왜 안 보내시오” 그저 서운함





수레를 이끄는 남자. 기운차게 움직이는 소. 흥겨운 아이들. 정답다. 그 화목함에 흠뻑 스며든다. 10여년 전 한 전시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처음 보았을 때 감상이다. 뒤늦게 그림 설명을 보았다. 1954. 한국전쟁이 끝나고 1년 뒤. 깊게 생각지 않았다. ‘희망을 품고 살았나 보네.’ 2022년 서울미술관 전시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재회했다.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하게 활기가 넘치는 거 아닌가.’



유복하게 자란 이중섭은 장난기 가득한 소년이었다. “형은 광 속 같은 방에 숨어 나오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소학교에 같이 다닌 화가 김병기의 말이다. 22살인 1937년 일본 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학풍은 그와 어울렸다.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여러번 입선했다. “우리 화단의 일등으로 빛나는 존재.” 김환기의 찬사다. 야수파의 기운을 흡수해 한국적으로 표현했다. 이중섭만의 격렬하게 몰아치는 필치가 시작되었다. 찬란함이 쏟아진다. 예술가의 탄생을 알리는.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라는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 시대의 파도는 밀려들었다. 한국전쟁으로 월남을 결심한다. 원산에서 부산, 제주 서귀포, 다시 부산으로 떠돌았다. 아이들은 영양실조였다. 1952년 마사코는 두 아들과 일본으로 향했다. 생이별이었다. ‘함께’라는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다.



필치는 결을 채워 더 활달해졌다. 원색을 과감하게 펼쳤다. 아내와 아들을 보낸 후 기법이 변했다. 유독 눈에 띄는 건 거리감이다. 몸이 닿아 있다. 얼굴을 맞닿았다. 묘한 강박이 느껴진다. 1940년대 작품처럼 거리를 유지하거나 홀로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춤추는 가족’(1953~1954) 속 가족은 빙글대며 돌고 있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1953~1954)에서 동그랗게 서로를 껴안았다. “사흘에 한통씩 써달라고 애원했는데 왜 답장을 안 보내시오.” 아내에게 답장을 재촉하는 글자마다 서운함이 묻어난다. 현실은 이처럼 달랐다. 솔직하고 연약한 인간 이중섭은 작품 너머에 있다. 서글프다. 행복을 기어이 만들겠다는 이중섭의 경쾌한 붓질이.



“아빠가 오늘 엄마, 태성이, 태현이와 함께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어요.” ‘길 떠나는 가족’의 습작이 담긴 엽서화 속 편지다. 같은 시기 그림들과 조금 다르다. 일렬 구도다. 주로 그린 부둥켜안는 구조가 아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앞서 있다. 가족들이 탄 소달구지를 이끌고 있다. 힘껏 뻗은 그의 도드라진 손이 생경하다. 속내를 엿본 기분이었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결핍은 숨지 않는다. 끈을 잡은 남자의 손에서 간절함을 본다.



바람이란 잔인하다. 커져갈수록 무기력하다. 이중섭은 부산·통영·대구·서울로 옮겨 다녔다. 화가로서 명성은 커졌다. 작품 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난은 그를 기어코 떠나지 않았다. 깊어지는 그리움과 비례해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어둠은 조용히 다가와 단번에 그를 할퀴었고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한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예술을 한답시고 놀고 다니며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이중섭의 절규를 평생의 벗이었던 시인 구상이 회고했다. 삶이 끝났다. 40살이었다.



그림과 화가의 운명이 일치할 때가 있다. ‘길 떠나는 가족’은 개인이 처음 작품을 구매했으나 이중섭이 그를 찾았다. 돌려달라고 사정했다. 재회를 향한 소망을 담았기에 팔고 싶지 않았다. 대신 ‘황소’ 그림을 주었다. 이후 몇차례 소장자가 바뀌었다. 그림은 계속 떠나고 되돌아왔다. 오랜 염원은 여전히 진행 중이려나. 그림에 눈을 맞춘다. 하얀 비둘기를 날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 어서 만나고 싶어요.”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한겨레

류노아의 ‘실낙원’(2021). 류노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인가?’ 2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부암동을 걷다 포스터에 이끌려 갤러리로 방향을 틀었다. ‘웨이팅룸’(Waiting Room)이란 전시였다. 과거 유럽의 르네상스 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을 지나 ‘실낙원’ 앞에 섰다. 이브가 있다. 포스터에서 감춰져 있던. 아담도 보인다. ‘수상하네.’ 알고 있던 이야기가 아닌 듯하다. 선악과의 존재는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몸을 감추지도 않는다. 성경 속 도상임이 분명함에도. 그때 생각했다. 2021년 류노아의 ‘실낙원’을 읽어내고 싶다고.



얼마 전 우연히 들른 전시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되살아났다. 담아두었던 의문이. 최초라는 단어를 되뇐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 첫번째 부부. 신기하다. 가족의 탄생과 고통의 개념은 동시에 생겨났다. 밀착된 관계는 외로움을 지운다. 다만 버거움을 동반한다. “혼자 살다가 다시 가족들과 살면 못 견딜걸?” 우리는 입을 모아 말한다. 지방 근무를 끝내고 서울 본가로 들어올 때였다. 쉽지 않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가족을 향한 큰 애정과는 별개로.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하는 가설에서 시작했어요.” 류노아는 답했다. 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이 살았을 것이라고. 직접 만나 대놓고 물었다. 그 장면을 담아냈단다. ‘실낙원’의 서사에서 뱀은 나무에 붙어 있을 뿐이다. 움직이지도 꾀어내지도 않는다. 아담도 이브도 뱀도 각자 자리를 지킬 뿐이다. 철저하게 거리를 두면서. 창세기를 모티프로 한 작품 안에서 희미해져가는 가족의 표상을 본다.



류노아는 네덜란드·독일 유학 중 얼마간 몸이 심하게 아팠다. 캔버스로 손을 뻗을 수도 없던 날들이었다. “가족이 너무 그리웠지만 아프다고 바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실낙원’에는 그때의 마음이 담겼다.



수묵보다 유화 물감에 끌렸단다. 자유로이 다채로운 색을 내고 싶었다고.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유화를 그리는 이유다. 여러 시도와 실험은 늘 진행 중이다. 작업 초기 캔버스를 채우던 진하고 강렬했던 색들이 이제는 옅어지고 바래졌다. 맺어짐에서 점점 멀어진 오늘날의 가족의 모습처럼. 여운이 짙다. 흐릿한 변색들로 채워졌음에도.



가족이란 양면적이다. 마법 같은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곳보다 따스하나 칼에 베일 때도 있다. 이중섭은 가족 모두가 단단하게 엮여있기를 바랐고 류노아는 닿지 않는 각자의 공간을 만들었다. 당신은 어느 가족을 꿈꾸는가. 완벽한 낙원은 없다. ‘함께’하거나 ‘홀로’ 있거나.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