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타인의 업적을 인정하는 사회 [노정혜 칼럼]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왼쪽부터 문수복 교수, 차미영 교수, 스베틀라나 모이소프 박사. 김재욱 화백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주제를 주도적으로 탐구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들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익히고 적용하면서 답을 찾아 나간다. 찾은 답들은 연구 성과로 발표되며, 이어지는 또 다른 연구와 개발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이때 자신의 연구가 다른 사람에게 인용되고 인정되는 것은 고생 끝에 얻게 되는 뿌듯한 보람일 뿐 아니라 향후 자신의 경력에 큰 자산이 된다.



업적에 대한 인정은 경력을 중요시하는 모든 분야에서 필수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내 업적의 토대가 되는 다른 사람의 업적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은연중에 축소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많다. 대학원생이나 예비 연구자들을 지도할 때 제일 강조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도, 다른 사람의 업적을 제대로 인용하거나 인정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이 부실해지면, 표절에 빠지거나 남의 업적을 가로채는 불상사도 일어나게 되고, 종국에는 지식의 네트워크에서 소외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세계적 과학 학술지인 ‘네이처’에서는 2023년 과학계에서 주목할 10명을 선정하면서 미국 록펠러대학의 스베틀라나 모이소프의 이야기를 부각했다.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생화학자인 모이소프 박사는 198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단백질을 합성하는 센터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는 호르몬(GLP-1)을 합성했고, 의과대학의 조엘 해브너 교수 연구실과 협력해 그 호르몬의 생성 기작을 알아냈다. 이 호르몬은 이후에 당뇨병 치료제와 비만 치료제로 개발되며 블록버스터 신약들의 모체가 되었다.



신약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대규모 연구실을 운영하며 리더 역할을 했던 해브너 교수와 달리, 모이소프 교수는 록펠러대학으로 옮겨 소규모 연구실에서 자신의 연구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당연히 자신이 발명자로 포함되어 있어야 할 이 특허에 해브너 교수만 등재되어 있음을 발견했고,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다. 수년간의 외로운 법적 투쟁을 이어 간 끝에 그는 4건의 관련 특허에서 모두 발명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사연을 뒤늦게 알게 된 그의 동료들이 합세해 지엘피-1의 발견을 다룬 논문과 기사들에 모이소프 교수의 공헌을 언급할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누락 오류가 일부 바로잡히게 되었다. 지엘피-1이 인류의 건강에 끼친 획기적인 효과를 감안하면, 최초와 최고를 중요시하는 노벨상 수상의 대상으로 그의 업적이 고려될지는 향후 지켜볼 일이다.



모이소프의 이야기를 보면, 과학계에서 여성이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편견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편견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과학기술과 공학 분야에 여성 교수가 진입하고 활약하며 여학생들을 유인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교수 임용을 위한 면접을 할 때, 숨겨져 있던 편견이 드러나는 사례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구미 선진국의 저명한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동등한 경력의 남녀 후보가 지원했을 때, 남자 후보에 대해서는 지도교수의 인맥을 활용해 앞으로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반면, 여자 후보에 대해서는 지도교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는 이중 잣대가 여전히 존재한다. 서울대학을 비롯한 국내 유수 공과대학에서 여교수가 10%를 넘지 못하며 여학생의 비율이 여전히 답보 상태인 현실은 여성의 리더십과 역량에 대한 보이지 않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초 여러 매체를 통해 카이스트 전산학부 차미영 교수가 독일의 세계적인 연구기관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연구단 단장이 된다는 쾌거가 소개되었다. 보안과 프라이버시 연구단을 맡게 될 차 교수는 전산과학과 사회과학의 융합 그룹을 이끌면서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해 각종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일을 선도하게 된다. 인류를 위한 데이터사이언스 연구의 세계적 리더로 커갈 그의 장도를 축하하는 많은 기사들 가운데, 그를 길러낸 토대에 대한 언급은 카이스트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거친 토종 박사라는 것이 유일한 정보였다.



문득 그를 길러낸 카이스트 공대의 전산학부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경력을 코치해주었던 지도교수는 카이스트 공과대학 최초의 여성 정교수인 문수복 교수였다. 2003년 카이스트에 부임한 문 교수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의 폭발적 성장을 논문으로 예견했던 정보기술(IT) 분야 국제 전문가지만, 부임 당시 카이스트 공대의 첫 여교수가 앞으로 보여줄 역량을 크게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카이스트 전산학부에는 아시아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교수를 비롯한 선배들이 여교수와 여학생들의 능력을 믿어주며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토대 위에서 문 교수를 비롯한 출중한 여교수들이 활개를 펴고, 여학생들이 그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는 화려한 성과에 환호하지만 그 열매를 이루어낸 토대는 간과하기 일쑤다. 17세기 과학혁명의 선구자인 아이작 뉴턴이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기반으로 발전하는 과학의 작동 원리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성과는 그것을 얻은 주체가 저명한 대가이든 낮은 직급의 연구원이든, 아니면 갓 입문한 신참이든 관계없이 업적 자체로서 그 가치를 공정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어떤 성과든 그것을 가능케 한 토대를 학술적, 기술적, 문화적 측면을 망라한 다양한 관점에서 광범위하게 인정해야 한다.



4·10 총선을 지나면서, 우리는 남의 업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약점과 결점 잡기만이 난무하는 선거판에 낙담하면서, 사회 모든 영역에서 그런 부정적 문화가 득세하고 고착될까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의 업적을 나의 발판으로 인정하면서 새 업적 쌓기가 시작되는 건전한 과학의 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확산된다면, 전임자의 성과를 애써 무시하고 폄훼하는 폐습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