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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5·18 당시 성범죄로 임신→출산→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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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44년, 가슴에 묻은 진실①]

1998년 3차 보상 당시 성폭행 피해 사실 진술

이웃집 통장의 "성폭행 당한 사실 없어" 진술 등으로 보상 기각

최근 당시 계엄군 작전 사실 확인해 부대·의심 가해자 특정했지만 조사 거부

편집자 주
올해로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44년. 5·18 당시 계엄군 등이 저지른 성범죄가 조금씩 규명되고 있지만 일부 피해자가 사망하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입증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광주CBS 취재를 통해 일부 5·18 성범죄가 출산이나 유산 등 2차 피해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또 남성들 역시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많은 5·18 성범죄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한 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숨기며 지내고 있다.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린 뒤 인정받은 극히 일부만 트라우마 관련 치료를 받았을 뿐이다. 광주CBS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목소리나 그들의 자료를 직접 듣고 보며 5·18 성범죄의 진실에 더 다가가는 연속기획을 마련했다. 5·18 민주화운동 성범죄 피해 관련 첫 보상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5·18 성범죄 피해와 조사, 보상 등 전반에 대해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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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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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싣는 순서
①5·18 당시 성범죄로 임신→출산→입양?
(계속)

"출산한 아이를 ㅇ씨로 한 이유는?"

"(범죄 현장에서)'ㅇ'자를 보고 지었습니다"


지난 1998년 9월 19일 광주광역시청 회의실 청문회실에서 김기남(여, 가명)씨가 진술한 내용이다.

김씨는 1980년 5월 18일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다. 김씨는 "집 근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대문을 열라며 군인들이 대문을 발로 차서 문을 열어줬더니 군인들(장교 1명과 부하 3명)이 들이닥쳐 뒷방으로 끌려 갔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뒷방으로 끌려가 겁탈(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이후 김씨는 임신을 해 이듬해인 1981년 2월쯤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성폭행을 당하면서 계엄군의 옷에 쓰인 이름표를 봤고 그 성을 따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김씨는 출산 후 20여 일 뒤 지원동 소재 대한복지사회(영아보호소) 앞에 아이를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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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차 보상 당시 진술 조서.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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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진술을 보증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씨가 일하던 집의 주인인 A씨는 "당시 집에는 김씨 외에도 3명이 더 있었고 4명 모두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또 A씨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3명은 방에서 울고 있었고 김기남은 부엌에서 울고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당시 피해를 당한 여성 중 한 명은 제 딸이고 다른 한 명은 이후 동서지간이 됐고 또다른 한 명은 세입자였다"고 덧붙였다.

통장 "성폭행당한 사실 없어"…현장에 없던 이웃 진술로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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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차보상 확인조사결과 종합의견.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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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심의위')는 당시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참고인 2명에 대한 조사도 이어졌다. 그러나 김씨의 주장이 참고인들의 진술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김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웃에 살던 통장 B씨는 "김씨가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또 다른 참고인 C씨는 "성폭행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며칠 후에 들었다"며 "(김씨가 출산한) 아기를 집에서 3개월 정도 키웠다"고 진술했다.

김씨가 당시 낳은 남자 아이를 아동보호소에 위탁했다는 아동입소확인서와 당시 집주인이던 A씨가 성폭행 사건 직후 현장을 목격했다는 증거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김씨의 진술은 이웃 주민들의 진술과 어긋나면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됐다.

B씨가 현장에 없었지만 성폭행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한 점, 김씨가 아기를 데리고 있었다고 진술한 기간이 20여 일인데 반해 집주인인 A씨의 남편 C씨는 3개월이라고 주장해 차이가 있었던 점이 상이자 보상금 지급 신청이 기각된 사유가 됐다.

또 보상심의위의 조사 결과에는 "계엄군이 한가하게 부하들 앞에서 여성을 성폭행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도 적시됐다. 다만 보상심의위가 이를 뒷받침할 조사나 근거자료는 생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당시 보상심의위 조사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최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는 "당시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들의 수색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인했다"면서도 "계엄군들은 그런 행위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보상 신청을 했던 1998년 3차 보상 당시 보상신청인과 보증인, 참고인 진술에만 의존하는 조사가 주로 이뤄졌고 참고인들의 진술이 신청인과 다를 경우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해자 추정·당시 출산한 男(아들) 소재 확인…양측 조사 거부


현재는 5·18 성폭행 피해를 호소했던 김씨가 사망해 직접 조사는 불가능하다. 이에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는 주변인 조사를 벌였다.

김씨 아들은 영아보호소에서 지내다 몇 년 뒤 해외로 입양됐다.

5·18조사위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김씨가 기억하는 성과 일치하는 계엄군 장교를 특정해 조사 협조를 요청했다. 해외에 살고 있는 김씨 아들에게도 조사 협조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해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DNA 대조 등을 통해 김씨 아들과 계엄군 장교의 유전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행됐던 성범죄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졌는지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5·18 당시 성폭행을 당해 임신중절수술을 했다고 주장한 사건은 조사자의 거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광주시가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5·18민주화운동 8차 보상에 따라 최초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보상 절차에 돌입한 가운데 성폭력 피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보상 기준 등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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