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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중국에 맞서며 '몸값' 높인다…필리핀 마르코스 달라진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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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지난해부터 남중국해로 해외 취재진을 초청하고 있다. 중국 해경의 필리핀 선박 위협 행위를 눈으로 보게 하겠다는 취지다. 필리핀 당국은 스카버러 암초 인근에서 조업하는 어부들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배에 취재진을 탑승시킨다.

지난해 12월 이 배에 탔던 뉴욕타임스(NYT) 기자는 "중국 해경은 우리 배가 어부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둘러싸고 물대포를 발사했다. 물줄기가 마치 바다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배를 흔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필리핀과 중국의 영유권 다툼이 격화하는 가운데, 필리핀 정부는 최근 들어 중국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U'자 형태로 9개의 선(구단선)을 긋고 90%가 자국 영해라고 주장한다. 주변국인 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과 분쟁을 겪고 있는데, 유독 필리핀이 가장 거세게 대항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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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2일(현지시간)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 근처에서 어민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필리핀 선박(왼쪽)을 중국 해경이 위협하는 중국 해경(오른쪽)의 모습.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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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 높아진 필리핀, 왜



배경엔 중국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이 있다.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미국에 중국 견제에 필수적인 요충지다. 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교차점에 있고, 거리상 양안(대만·중국)과 가깝다. 여기에 마르코스 정권이 중국에 날을 세우며 필리핀의 '몸값'이 한층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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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현지시간) 미국과 필리핀 군 관계자들이 발리카탄 훈련에 앞서 훈련 이름이 의미하는 어깨를 나란히 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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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필리핀은 연례 군사 합동훈련 발리카탄(Balikatan·어깨를 나란히)을 1991년 시작했다. 지난 22일(현지시간)부터는 필리핀 영해 바깥 남중국해 해상에서 중국의 도발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최근 중국을 겨냥한 미국·일본과의 3국 협의를 통해 안보·경제 지원을 얻어냈다.

이런 행보는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과는 딴판이다. 친중 성향인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2022년 6월까지 재임하던 6년간 중국에 몸을 낮췄다. 두테르테와 마르코스의 서로 다른 계산이 정반대의 외교 전략을 낳았다는 분석이다.



中·필리핀 '남중국해 우리 것' 충돌의 역사



남중국해는 미·중 패권 다툼의 요충지다. 세계 해상 물동량의 30%가 오가는 이곳은 중국엔 에너지·원자재·상품 수출입 등의 통로다. 미국엔 태평양 지배권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다.

남중국해를 자국 바다로 만들려는 중국에 필리핀은 눈엣가시다. 2016년 당시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정권은 국제상설재판소(PCA)에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불법이라고 제소했다. PCA는 중국의 이런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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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세력 확장에 맞서 필리핀이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고정시켜 군사기지로 사용 중인 시에라 마드레함.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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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필리핀은 주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 인근에서 충돌하고 있다. 갈등이 표면화된 건 1995년 중국이 스프래틀리군도의 미스치프 암초에 군사시설을 지으면서다.

이에 대응해 필리핀은 1999년 미스치프 암초에서 약 40km가량 떨어진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시에라 마드레함을 고의로 좌초시켰다. 필리핀은 이 선박을 고정해 해병대를 주둔시키는 등 군사기지로 활용했다. 시에라 마드레함은 2차 세계대전 때 상륙함으로 썼던 녹슨 폐군함이다. 시에라 마드레함의 철거를 요구하는 중국은 필리핀 보급선에 물대포를 쏘는 등 실력 행사를 하고 있다.



두테르테와 마르코스, 어떻게 계산 달랐나



마르코스의 전임자 두테르테는 취임 후 해외 첫 순방지로 중국을 택하고 중국을 "가까운 이웃"이라고 부르는 등 친중 행보를 보였다.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중국은 필리핀에 일대일로 사업의 연장선에서 240억 달러(약 32조9000억원) 규모의 인프라 투자를 약속하며 화답했다.

하지만 양국은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인프라 건설에 합의하지 못했다. 자금난으로 일대일로 사업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특히 두테르테의 유화책에도 중국은 필리핀 어선 위협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병력을 증강했다. 두테르테의 친중 노선에 대한 필리핀 내 여론도 악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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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필리핀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닐라에서 만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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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대통령은 중국에 손을 내미는 대신 미국 등과 동맹 강화에 나섰다. 미국과 필리핀은 1951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동맹이나, 식민 지배 역사로 사이가 원만하지만은 않다. 마르코스가 급격히 미국 쪽으로 돌아서자 "두테르테를 보며 대중 유화책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필리핀은 지난해 자국 내 미군 기지를 기존 5개에서 최대 9개까지 늘리기로 합의했다. 지난 11일엔 미국·일본·필리핀 3국의 사상 첫 정상회의를 통해 합동 해상 훈련과 순찰을 하기로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필리핀 기반 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고, 미 의회는 필리핀 국방 강화를 위해 25억 달러(약 3조4000억원)를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올해 유럽·호주·베트남 등을 찾아 중국과의 충돌에서 자국에 대한 지지를 끌어냈다. NYT는 이런 그의 행보에 대해 "중국과 남중국해를 두고 분쟁하는 중요한 시점에 강력한 외교 정책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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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필리핀 정상이 지난 11일(현지시간) 3국 정상회의를 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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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국민의 복잡한 속내



그러나 필리핀 일각에선 미·중 패권 갈등 속에서 피해를 볼 수 있단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군 기지를 늘린 것과 관련 "중국의 대만 침공 시 미군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마르코스 정권의 외교 정책을 바라보는 필리핀 국민의 복잡한 속내는 현지 매체의 사설에서 엿볼 수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은 중국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전임자의 정책보다 훨씬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동맹도 국익을 지키기 위한 억지력이란 방패를 우리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마닐라 타임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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