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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28] 헤이즐넛 꽃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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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볼프강 라이브, 헤이즐넛 꽃가루, 2013년, 꽃가루, 약 700x800cm, 뉴욕 근대미술관 전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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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면 아마 이런 색일 것이다. 전시장 바닥을 벨벳처럼 부드럽게 덮은 노란 가루에서 빛이 난다. 가루의 정체는 헤이즐넛 꽃가루. 독일 미술가 볼프강 라이브(Wolfgang Laib·1950~)는 이 작품을 위해 꿀벌처럼 일했다. 요즘 말로 ‘꿀 빠는’ 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다. 남부 독일 시골 마을에 사는 라이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집 주위 숲에서 꽃가루를 모았다. 꽃가루를 모을 수 있는 봄은 기껏 한 달 남짓이라, 그 짧은 기간 동안 라이브는 매일 홀로 숲에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나뭇가지를 살살 털어 그릇에 꽃가루를 모으며 수년을 보냈다. 그렇게 모은 가루가 작은 유리병 열여덟 개를 채웠다. 전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체에 가루를 걸러 바닥에 고르게 뿌리는 것 또한 작가의 일이다. 확실히 라이브에게 꽃가루 알레르기는 없는 모양이다.

라이브의 모습은 마치 모래로 만다라를 만드는 티베트 승려 같다. 실제로 라이브는 불교에 심취해 산스크리트어를 익히기도 했으나, 미술가가 되기 전까지는 의학 박사였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 숱하게 보았던 죽음과 고통을 평생 버틸 자신이 없었다. 생로병사라는 근원적 고통을 이해할 방편으로 불교에 의지했고 깨달음을 미술로 표출하고자 했다. 그에게 꽃가루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짧은 봄에 먼지처럼 날리다 마는 이토록 미세한 존재로부터 새싹과 꽃, 이파리와 열매, 나무와 숲이 태어나 인간의 생애에 비할 수 없는 세월을 산다.

물론 이 땅의 500만 알레르기 환자들은 기겁하겠지만, 가루가 날리지 않아 작품은 무해하다고 한다. 곧 노란 꽃가루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숲이 있어야 휴지도 있으니 눈물, 콧물을 열심히 닦으며 견뎌봐야겠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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