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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법정B컷]급발진 소송, 이번에도 소비자 '패소'…판사가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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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노컷뉴스

2020년 10월 A씨가 탄 볼보 차량은 최대 120km/h의 속도로 달린 끝에 국기 게양대를 들이받고서야 멈춰섰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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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이 2022년 7월 첫 재판부터 전해드린 볼보 급발진 의혹 사건의 선고가 이뤄졌습니다.

결함 입증 책임이 1차적으로 소비자에게 있는 우리나라에서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이 최종 인정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번 볼보 급발진 의혹 소송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소비자 패소.

재판부는 수년간 다양한 감정을 진행하며 그날의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한 끝에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현행법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습니다. 오늘 '법정B컷'은 약 2년 간 전해드린 '볼보 급발진 의혹' 이야기의 1심 마지막 법정으로 가봅니다.

인정되지 않은 급발진… 그럼에도 판사가 남긴 말

운전 경력 23년의 50대 여성 A씨는 지난 2020년 10월, 경기도 판교도서관 인근에서 과일을 사기 위해 자신의 차량(볼보 S60)에서 잠시 내렸습니다. 시동이 걸린 상태였죠. 이후 다시 차량에 탑승했는데, 불과 몇 초 뒤 차량은 굉음을 내며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차량은 어린이 보호구역과 3개의 사거리를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신호등과 과속방지턱을 무시한 채 달렸습니다. A씨는 "이거 왜 이래"라며 소리를 내질렀지만, 차량은 감속 없이 최대 속도 120km/h로 질주했고 국기게양대를 들이받고서야 멈춥니다.

전치 20주의 부상을 입은 A씨는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이라며 2021년 3월 볼보를 상대로 2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냅니다. 그리고 그 1심 결과가 약 3년 만인 지난 17일 나왔습니다.

2024.04.17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선고中
재판부 "이 사건의 경우 운전자가 정상적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사고 발생했는지 강한 의심이 들어서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주문,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재판부는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재판부는 이날 주문에 앞서 현행 '제조물책임법'에 대한 아쉬움을 먼저 토로했습니다.

2024.04.17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선고中
재판부 "음, 이 사건은 급발진 관련된 사고가 계속 문제가 되고 있고, 제조물책임 관련해서도 법률이 (소비자의) 증명책임을 완화하고 있지만… 이런 유형과 특성을 비춰봤을 때 다소 다른 방식으로 증명책임 완화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판부가 이날 언급한 '제조물책임법'은 결함 입증의 1차 책임을 소비자에게 부과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1차적으로 '자신은 정상적으로 제품을 썼고, 해당 결함이 자신이 아닌 제품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품에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기업에게 입증 책임을 부과하는 겁니다.

제조물 책임법 제3조의 2(결함 등의 추정)
피해자가 다음 각 호의 사실을 증명한 경우에는 제조물을 공급할 당시 해당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그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제조업자가 제조물의 결함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인해 그 손해가 발생한 사실을 증명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1. 해당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2. 제1호의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됐다는 사실
3. 제1호의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아니한다는 사실

재판부도 현행 제조물책임법의 한계를 느꼈던 것일까요? 재판부의 이러한 아쉬움은 판결문에도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판결문中
재판부 "자동차의 급발진 의심 사고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고, 그중에는 실제 급발진이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단정하기 어려움에도 우리나라에서 급발진으로 제조사에게 책임을 인정한 종국적인 판단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급발진 의심사고에서 제조물 책임을 묻기 위한 소비자의 증명책임을 좀 더 완화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급발진 의심 사고에서 소비자 측의 증명은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 등에 비춰 사고의 양상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통해 해당 사고가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 그러한 비정상적인 사고를 유발할 만한 소비자 측의 요인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 간접사실들, 예컨대 소비자 측의 신체적·정신적 결함, 환경적 요인, 운전경력과 습관, 차량 개조 여부, 사고 회피를 위한 노력 여부 등과 같은 사실들로 증명하면 일응 결함으로 인한 사고 발생을 추정하되 제조업자가 차량의 결함과 무관하게 그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상당한 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그 추정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 등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결론은 "급발진 아니다"… 국회에서 멈춘 도현이법

노컷뉴스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는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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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볼보 급발진 의혹 재판은 상당히 많은 감정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재판부가 첫 변론기일 때부터 일찌감치 적극적인 감정을 예고하기도 했죠.

2022.07.06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첫 변론기일中
재판부 "사안과 내용 등이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증거 조사 신청을 되도록 채택할 것이니 '채택하면 안 된다'는 식의 의견은 내지 마세요"

"감정이 필요하거나, 검증이 필요하다는 등의 방향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재판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재판에서 차량 음향 분석과 블랙박스 감정, CCTV 영상분석, 차량 부품(파킹폴)에 대한 감정 등 다양한 절차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재판부는 감정 결과 차량에 의한 결함이 입증되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차량이 주차(P) 상태였는데 돌연 차량 스스로 급발진했다는 A씨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 볼보 급발진 의혹 손해배상 판결문中
재판부 "원고들은 변속레버가 주차(P) 모드에서 ECU 오류로 급발진했다고 주장하나, 사고 직전에 변속레버는 주차(P)모드가 아닌 주행(D)모드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략) 이 사건 자동차는 변속레버가 주차 모드일 경우 파킹폴(Parking Pawl)이 변속기의 출력 측 기어에 맞물려 있어, 바퀴에 연결된 출력 측 기어가 회전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방지된다"

"따라서 만일 이러한 파킹폴이 출력 측 기어에 결합한 상태에서 차량이 급발진한다면 파킹폴에 손상이 생길 것인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이 사건 자동차를 감정할 당시 이 사건 자동차 변속기의 파킹폴과 파킹기어에 손상 및 파손이 확인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음향 분석 결과 변속기를 주차(P)에서 주행(D)으로 바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A씨의 주장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블랙박스가 늦게 켜져 변속 소리가 녹음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음악 등 다른 소리로 인해 감정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날 패소한 A씨 측은 항소를 검토 중입니다. 현행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A씨 측은 항소심에서도 1심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정상적으로 차량을 운행 중이었다는 점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A씨 측의 법률대리인은 현재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진행 중인 티볼리 급발진 의심 사고, 이른바 '도현이 사건'도 맡고 있습니다. 급발진 의심 사고로 차에 있던 12세 아동 이도현 군이 숨진 사건이죠.

국민적 관심을 받은 이 사건은 현재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에게 부과하는 '도현이법'을 준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만 도현이법은 아직 21대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서 멈춰 있는 상태입니다. 21대 국회가 종료되면 도현이법도 자동 폐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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