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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차별받는 것보다 더 슬픈 건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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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해 7월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서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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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3월15일에 서울시 시민청의 태평홀 대관신청서를 냈다. 문화기획자 단체인 ‘문화다움’에서 주는 ‘문화다움기획상131’을 작년에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수상한 기념으로 대표적 민간 축제로서의 의의와 가치를 살피는 토론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3월20일에 대관 승인이 났고 단체등록증도 제출했다. 대관료도 선납했는데 시민청은 총선 다음 날인 4월11일 조직위로 전화해 ‘정치적’ 행사니 어쩌니하는 말을 했다. 두 시간 후엔 대관이 21시까지라며 홍보물에 행사 시간이 21시로 게시된 걸 문제 삼았다. 조직위는 21시까지 퇴실을 완료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오전엔 참가자가 100명을 초과하면 안 된다며 신청자 수를 물었다. 100명이 안 된다고 답했더니 오후에 시민청이 아닌 서울시 홍보과에서 전화가 왔다. 처음 제출한 신청서와 홍보물의 내용이 다르다며 트집을 잡더니 대관 취소 공문을 발송했다. 근거는 시민청 대관 운영규정 제8조 ‘대관 허가 후 대관신청서의 기재사실이 허위로 밝혀졌거나, 사용 내용에 중대한 변경 사항이 있을 때’라며 대관료 환불도 80%만 한다고 통보했다. 검열하고 차별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위약금까지 물리겠단다. 퀴어에게 공간은 주기 싫어도 퀴어의 돈은 싫지 않은 모양이다.



서울시가 말하는 ‘허위사실’이란 대관신청서의 행사명과 행사내용이 홍보 포스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축제: 민주주의를 이루는 시민의 힘’이란 제목에서 ‘퀴어문화축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화의 힘’으로 변경되었다. 행사 주최를 속인 것도, 토론 주제가 바뀐 것도 아니다. 초기 기획 단계보다 제목이 더 구체화된 것이 ‘허위’일까. 무엇이 대관을 취소할 정도의 중대한 변경 사안일까.



차별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 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도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국제강연회 행사 대관을 거부했다. 사유는 ‘정치적 이슈로서 첨예한 갈등을 유발하는 주제의 행사로 공간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민원 발생의 소지가 있는 행사’였다. 그저 해외 성소수자 활동가를 한 명 초청하는 강연회일 뿐이었음에도.



서울 광장의 불허 과정도 교묘하긴 마찬가지다. 작년까진 서울도서관이 운영하는 ‘책읽는 광장’ 행사가 6월까지 광장을 선점하고 7월, 8월엔 더위를 이유로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책읽는 광장’ 행사가 4월 셋째주부터 8월 넷째주까지를 선점했다. 퀴어 퍼레이드를 불허하고 개신교 단체의 행사를 허용해 비판을 받았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우아하게 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작년에 한국퀴어영화제도 평소 사회공헌을 내세우던 영화관에서 대관 거부를 당했다. 근거는 “사회적으로 찬반의 의견이 나뉠 수 있는 소재에 대한 상영이나 대관이 어려운 점”이었다. 차별받으면 아파야하는데 지금은 슬프다. 일상에선 모두, 성소수자의 곁에 선 이웃들일 텐데 귀찮은 민원을 피하고자, 괜한 소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윗선의 눈치가 보여서 차별을 합리화할 근거를 찾아 서류를 뒤적거렸을 장면을 상상하면 서글프다. 차별은 너무 쉬워서 차별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줄어들지 않는다. 힘있는 자들의 개과천선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업무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조금 더 힘을 내주길 바란다. 대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불허하는 흐름을 거부할 수 있길. 같은 시민으로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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