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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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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올리느니 문 닫겠다”… 매일 아침 줄서던 빵집의 사연 [방구석 도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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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소울 푸드, ‘빵집’의 위기

지난해 도산 역대최다, 코로나도 아닌데 왜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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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이타바시구 제과점 ‘Kaji Pan!'이 판매 중인 빵들. 메이플시럽을 바른 메론빵이 간판 메뉴로 가격은 10년째 130엔(약 1200원)이다./구글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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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이타바시구 주택가에는 ‘Kaji Pan!(카지빵)’이란 소규모 빵집이 있습니다. 지난달로 창업 10주년을 맞은 이곳의 명물은 메이플시럽을 바른 메론빵. 가격은 130엔(약 1200원)으로 10년 전과 동일합니다. 크림빵 등 다른 제품 가격도 10년째 130엔입니다. 숱한 물가 상승과 불경기에도 “가격 인상은 고객에게 부담이 될 뿐. 우리 빵을 사랑하는 손님이 배불리 먹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점주의 ‘철학’으로 버텨 왔다죠.

이러한 ‘서민 친화적’ 가격에 주민들은 매일 아침 7시 30분 가게 문이 열릴 때마다 긴 줄을 늘어서며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빵집에 한 벽보가 내걸려 주민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 벽보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5월 31일(금) 폐점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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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이타바시구 제과점 ‘Kaji Pan!(카지빵)’/이타바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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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일본 구글맵 리뷰에서 평점 5점 만점 4.4점을 기록할 정도로 인근 주민뿐 아닌 도쿄 빵돌·빵순이들의 ‘숨은 맛집’으로 각광받아 온 카지빵. 이곳은 어쩌다 개업 10년째 된 해에 폐점을 결심하게 됐을까요?

점주는 폐점 공지 벽보에서 “큰 폭의 가격 인상은 내 본의(本意)와는 거리가 있어 폐점을 결단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10년째 균일 염가로 버텨 왔지만 최근 물가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가격 인상은 본래 운영 철학과 부합하지 않아 아예 영업을 멈춘다는 말이었죠. “가격이 2배 오르더라도 계속 먹고 싶다”는 주민들의 탄식이 쏟아졌지만 점주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원가가 너무 올랐습니다. 빵 하나에 최소 50~100엔을 인상하지 않는 이상 원가 회수는 무리에요. 하지만 제게 빵은 맛있고, 가깝고, 부담없이 살 수 있는 것이여야합니다. 우리 같은 작은 빵집들은 조만간 사라질 운명인 것입니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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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빵의 원조 일본 에히메현 제과점 '팡 메종'에서 판매 중인 소금빵/인터넷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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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에게 빵은 전후(戰後) 서민들의 굶주림을 달래주는 양식으로 시작해 현대에 이르러선 식사부터 간식, 디저트까지 해결해주는 ‘소울 푸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인의 ‘빵 사랑’은 유별나죠. 이번 달 공개된 일본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장래희망 직업 1위는 ‘케이크가게·제과점 점주’. 반짝인기가 아니라, 무려 4년 연속 1위입니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많은 한국과 달리, 일본엔 역전(驛前)·주택가·대학가 등 거리마다 고소한 빵내음을 퍼뜨리는 소규모 개인 빵집이 많습니다. 세대를 불문하고 일본인들의 사랑을 독식하던 거리 빵집이지만, 최근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지난 5일 도쿄상공리서치가 발표한 도산 동향 조사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빵 제조 소매(제과점)’ 도산 건수는 전년보다 2배 급증한 37건이었습니다. 조사 개시 이래 최다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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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상공리서치가 지난 5일 발표한 전국 빵집 도산 동향 데이터. 지난해 37건으로 전년보다 2배가량 늘었고 조사 개시 이래 최다를 기록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세상은 늘 불경기고, 어느 업계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일본 빵집 업계가 유독 눈에 띄게 추락하는 양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도 거뜬히 버텨낸 빵집 업계이기에 이번 조사 결과가 가져온 충격은 큽니다. 사실 코로나 때 빵집은 외출 자제로 ‘테이크아웃’ 손님이 늘어난 한편 일반 음식점과 동일한 정부 지원을 받으며 오히려 특수(特需)를 누렸었어요. 코로나 위기로 도산한 빵집 수는 2020년 1건, 2021년 3건으로 타 업계에 비해 현저히 적었죠.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가고 각종 정부 지원책이 끊기자 업계에 닥쳐온 악영향이 하나둘씩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코로나가 남긴 고물가는 최근 엔화 약세로 한층 두터워졌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빵 원재료인 밀·버터·우유 가격이 급등한 영향이 특히 심각하다고 합니다. 재료값 상승 탓에 도산한 빵집 수는 2021년 0건에서 이듬해 5건, 지난해 10건으로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일본 제일생명경제연구소 수석 분석가 나가하마 도시히로씨는 지난 12일 FNN(후지뉴스네트워크)에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값이 크게 올랐다.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모두 세계 최대 규모의 밀 수출국”이라며 “엔화 약세까지 겹쳐 밀 수입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보다) 1.5배 이상으로 올랐다”고 했습니다.

식문화 연구가 아코 마리씨는 도요게이자이(동양경제)에 “빵집은 원래 박리다매 장사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업체도 수작업 절차를 거쳐야만 하고 발효 등 번거로운 과정도 많다”며 “최근엔 ‘인스토어 베이커리(유통업체 내 매장)’를 개시하는 수퍼마켓도 급증해 (소규모 빵집들의) 경쟁자도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특히 빵의 경우 편의점이나 수퍼마켓에서 싼값에도 구할 수 있어 가격 인상이 쉽지 않다는 게 현지 빵집 점주들의 한탄입니다. 손님 입장에서 150엔에 사던 메론빵 값이 200엔으로 오르면, 그보다 저렴한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리는 게 차라리 낫단 것이죠. 이 때문에 원재료 가격이 올라도 상품 가격에 반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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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을 구운 과자 '러스크'. 시간이 지나 딱딱해진 식빵이나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를 활용해 만든다./recipe.cotta.jp


게다가 프렌치토스트와 크루통, 러스크 등 시간이 지난 빵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유럽과 달리 일본에서 빵은 ‘갓 구운 빵’이란 이미지가 짙어 하루만 지나도 빵을 폐기하는 곳이 많습니다. 유럽은 깜빠뉴나 바게트처럼 식사빵이 주류이지만, 일본은 식사·간식·디저트까지 아우르는 과자·반찬빵 위주란 점도 악영향을 줬죠. 제과 절차가 복잡해 손이 더 갈 수밖에 없고, 냉장·냉동 보관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폐기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 2인 이상 가구의 빵 소비 금액이 평균 4만1183엔(약 37만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던 일본 고베시의 경우 식사빵이 차지한 비율은 1만3468엔,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식사보다 과자·반찬빵에 훨씬 더 많은 수요가 몰린단 걸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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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음식 트렌드 조사 업체 구루나비소켄이 지난해 ‘올해의 음식’으로 선정한 ‘고치소 오니기리(주먹밥)’. 재료를 듬뿍 얹은 것이 특징이다./구루나비소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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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빵집의 몰락’은 새로운 음식 트렌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산케이신문은 최근 “저무는 빵의 인기가 ‘오니기리(주먹밥)’ 열풍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해 빵집 도산 건수가 역대 최다였던 반면, 오니기리 전문점 신규 개업 수는 전년보다 1.5배 급증했다고 합니다. 원재료 80%를 수입에 의존해 고물가·엔저에 취약한 빵과 달리, 오니기리 원료인 쌀은 100% 가까이 국내 자급할 수 있어 더욱 활보하고 있단 분석입니다.

일본 음식 트렌드 조사 업체 구루나비소켄은 “오니기리 전문점은 대규모 조리 기구도 불필요하고 제조에 고도의 기술도 필요 없어 인재도 확보하기 쉽고, 출점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다”며 “오니기리 속재료인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콘부(다시마) 등은 보존성이 높아 식품 폐기율이 낮은 등 메리트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 업체는 지난해 12월 ‘2023년 올해의 (일본) 음식’으로 재료를 듬뿍 얹은 게 특징인 ‘고치소(ご馳走) 오니기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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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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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서른네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일본인의 ‘소울 푸드’인 거리 빵집이 직면한 위기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32~33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벚꽃의 역설… 暖冬에도 늦게 핀 도쿄, 왜?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4/03/23KHNOZD25DMJHINVZBQJKHQ7A/

아이스크림 먹으려 日고교생들이 벌인일… “어른보다 낫네” 말나온 이유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4/10/WVX3YDCJGJCMVNTX7T2G4YON7Q/

‘방구석 도쿄통신’은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하단의 ‘구독’ 링크를 눌러주세요. 이메일 주소로 ‘총알 배송’됩니다.

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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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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