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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기자수첩] 서성이다 증발한 131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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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4.10 총선의 ‘정당 투표’ 마지노선은 3%였다. 38개나 되는 정당 중, 3% 이상을 얻은 곳에만 의석을 배분해줬다. 딱 4개 정당이 이 숫자를 넘겼다.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26.7%·14석)과 국민의미래(36.7%·18석), 조국혁신당(24.3%·12석), 개혁신당(3.61%·2석)이 각각 의석을 얻었다. 그런데 130만 9931명은 ‘다른 선택’을 했다. 득표율로 계산하면 4.4%. 원내 3석짜리 수치다. 당선인은 없다. 무효표라서다.

무효표도 말을 한다. 역대 국회 표결에서도 그랬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본회의 표결 안건으로 올랐다. 친박계 핵심 최경환 새누리당 의원을 제외한 299명이 투표에 참석했는데, 기권 2표에 7명이 무효표를 냈다. 차마 찬성도 반대도 하기 난처한 고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2023년 2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 때는 11장, 9월 표결에도 4장의 무효표가 나왔고 가결됐다.

2022년 4월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선 무효표만 300만 장이 넘었다. 223만 명이 빈 투표용지를 냈고, 79만표는 낙서, 훼손 등으로 무효 처리됐다. 투표지에는 “어느 쪽도 아님”이라는 문구가 쓰였거나 용지를 찢어 마크롱 대통령과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후보의 이름을 합친 경우도 있었다. 일간 르몽드(Le Monde)는 “백지 투표와 무효표에 또 다른 분노의 프랑스가 담겼다”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세종시갑 유권자 6700명의 표가 무효처리됐다. 세종은 2012년 선거구 신설 이래 민주당이 독식해온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 5.5%가 무효표를 냈다. 선거 직전 ‘부동산 투기’가 드러난 이영선 후보의 공천이 급히 취소된 영향이었다. 국민의힘 후보는 싫고, 그렇다고 민주당을 탈당한 제3당 후보도 마땅찮은 표심은 갈 곳이 없었다.

경기 수원정에선 ‘섹스 막말’의 주인공 김준혁 민주당 후보가 2377표 차이로 이겼다. 그런데 무효표가 4696장 나왔다. 이곳은 진보진영 경제통인 김진표 국회의장, 합리적 중도파 박광온 전 원내대표가 2004년 17대 국회부터 터줏대감으로 있었다. 민주당 텃밭이지만, 20년 내내 ‘점잖은 진보 인사’가 선택받았다. “이대생 미군 성상납” “퇴계는 성관계 지존”이라는 사람은 도저히 못 찍겠다는 양심이 4696표에 담긴 셈이다.

자기 딸·아들의 증명서를 위조하고 대리시험까지 쳐준 사람, 대통령 측근을 당선시키려 상대후보 수사를 지시한 사람, 22억을 받고 다단계 사기꾼을 변호한 사람의 배우자, 위헌정당 판결로 해산된 반미·종북 세력의 후신. 이런 사람들이 숨은 57cm짜리 투표용지를 받아 들고, 131만명은 선택하지 않을 권리를 택했다. 범야권 189석에 취해, 혹은 여권 108석에 잠식돼 ‘원내 4당’이 증발하도록 두기엔 131만표가 너무 무겁다.

이슬기 기자(wisdo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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