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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별세…근현대사 함께한 영욕의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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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4년 5월25일 노무현 대통령과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대기업대표와의 대화에 앞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최태원 SK 회장,이건희삼성회장(오른쪽부터) 등이 간담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이하 효성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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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해온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29일 별세했다. 향년 89. 고인은 효성그룹 창업주 2세로 사돈 관계인 이명박 대통령 재임 때인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31·32대)을 지냈다. 1960~1990년대 한국 산업의 급속한 성장기를 거치며 한때 효성그룹을 재계 10위권까지 끌어올렸으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로 부도 위기를 겪을 정도로 사세가 기운 뒤 이명박 정부 때 전경련 회장에 오르며 재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말년에는 세 아들 간 ‘왕자의 난’을 지켜봤다. 경영에서 손을 뗀 지는 7년여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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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 클린턴 대통령과 경제협력을 논의 중인 조석래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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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고-와세다-일리노이…창업 세대에선 드문 엘리트





1935년 경상남도 함안 태생이다. 경기고 3학년 재학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1959년 일본 와세다대 이공학부를 마쳤다. 다시 도미해 미 일리노이 공과대 석사를 마쳤다. 그의 이런 이력은 창업세대 혹은 창업주 2세 중에선 드문 편이다. 공학 석사를 취득한 뒤 귀국해 아버지 조홍제 효성 창업주가 세운 동양나이론주식회사에 입사했다. 관리부장이 효성그룹 내 첫 직책이었다. 당시 고인의 나이는 불과 26살이었다.



한 해 뒤 고인은 이 회사 건설본부장이 되어 울산공장 건설을 도맡았다. 1970년 동양나이론이 한일나이론을 인수하면서 고인은 대표이사에 오르며 본격 경영에 나섰다.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4년 만이었다.



효성그룹은 한국 경제 고도성장기 속에 빠르게 성장했다. 고인은 공학 전공자로서 기술 확보에 공을 들이면서도 시장 변화에 민감했다고 한다. 효성그룹이 펴낸 사사 ‘효성 40년사’를 보면, 1971년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 설립과 1973년 동양나이론 자회사 토프론 출범을 통한 페트병 생산은 빠르게 개선된 소득 수준에 따라 생활 습관이 변화하며 일회용품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고인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인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74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효성 중흥기 이끌어
국제 감각 뛰어난 실무형 총수
이명박 정부 때 전경련 회장으로 재도약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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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5월 청와대 만찬 행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조석래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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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제(1906~1984) 창업주의 회고록에는 아들인 고인에 대한 일화도 담겨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섬유산업을 넘어 효성이 다른 분야로 사업군을 넓히게 된 건 고인의 제안 때문이라고 한다. 1975년 고인은 아버지에게 한영공업 인수를 제안한 뒤 성사시켰으며, 1981년엔 765㎸ 초고압 변압기를 최초 개발한 효성중공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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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1월 금탑산업훈장을 받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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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흥기 이끌다 외환위기 때 사세 위축





고인은 효성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970~8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 증가에 힘입어 효성의 주력 분야인 섬유 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한 덕택이다. 1984년 영국 사우드지가 선정한 ‘개발도상국 500대 기업’ 중 42위에 올랐다. 당시 500대 기업 중엔 한국에서는 효성과 함께 삼성·엘지(LG)·현대 등 11개 기업만 포함됐다. 1983년 24개 계열사를 합병·매각하며 한차례 모습을 바꾼 효성그룹은 금융자동화기기(1983)와 카펫 생산, 종합타이어보강재(1985), 데이터시스템(1986) 등으로 사업을 넓혀갔다. 1990년대 들어 계열사는 더욱 늘었다. 주요 재벌그룹 성장사와 엇비슷하게 문어발식 확장이 효성에서도 진행된 셈이다. 이런 확장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심각한 리스크로 떠올랐다. 증권가 정보지엔 효성 계열사들의 연쇄 부도설이 연이어 올랐다. 효성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3년 동안 효성 바스프, 효성 에이비비(ABB) 등을 해외에 매각하며 유동성 위기를 간신히 버텨냈다. 효성물산·중공업 등 계열사 4곳을 합쳐 ㈜효성을 설립한 것도 1998년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구조 개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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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중국 가흥 타이어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조석래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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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감각 좋은 실무형 총수





고인은 ‘실무형 총수’였다고 한다. 고인의 팔순을 기념해 지인들의 글을 모아 출간된 ‘내가 만난 그 사람 조석래’(2017)에는 그의 다양한 면모가 담겨 있다. 고인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해 외교·소통 감각이 좋았고, 사내 별명은 ‘조대리’였다고 한다. 경제 관료 출신인 손병두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헌정사에서 “산업 시찰 현장에서 현장 엔지니어에게 쉼 없이 질문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갸우뚱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기억했다. 효성의 사외이사였던 권오규 전 재정경제부 장관도 “함께 해외공장을 방문할 때 공장 안에 기계들의 상태와 배치, 종업원의 후생과 노동조건까지 챙겼다”고 말했다. 사외이사를 지낸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005년 중국 청도, 2008년 터키 이스탄불, 2010년 베트남 공장의 이사진 방문 경험을 돌아보며 “다들 저녁 만찬을 하러 차에 오르는데 조 회장만 더 공장을 본다고 해서 남았다”고 했다.



현홍주 당시 김앤장 대표 변호사는 “(한미재계회의 한국위원장으로 회의 기간에) 영화업계의 스크린쿼터제 철폐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왜 타결해야 하는지 굉장히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재계에서 고인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은 ‘미스터 글로벌’이다. 일본통으로서 한일포럼 등을 이끄는 등 국제감각이 뛰어난 점을 추어올린 표현이다. 2009년 고인은 전경련 회장일 때 전경련회관을 다시 짓는 기회를 세계 기업에 개방해 버즈두바이와 타워팰리스 등을 설계한 외국의 건축회사를 선정하기도 했다.



김성근 야구 감독은 “조 회장은 승리가 야구단의 중요한 목표이며 우승하지 못하면 모두 패자”라고 대화 나눈 것을 기억했다. 1980년대 초 대한배구협회장과 아시아배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조 명예회장은 스포츠를 즐겼다고 한다. 특히 야구와 골프, 댄스선생님을 집으로 불러 댄스를 배웠다고도 한다. 재벌 같지 않게 전경련 행사 때 1만5천원짜리 도시락이 아닌 1만2천원짜리 도시락을 시키는 등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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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일본 당시 고이즈미 총리를 만났을 때 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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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계 분식·탈세 오명…세 아들 왕자의 난 일기도





여느 재벌 총수처럼 고인의 삶 역시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아버지 조홍제 초대 회장이 장남인 자신에게 효성그룹을, 둘째 동생인 조양래씨에게 한국타이어를, 셋째 조욱래씨에게는 대전피혁공업을 물려준 것처럼, 본인도 조현준·조현문·조현상 세 아들에게 효성그룹 경영권을 넘기려 했던 건 마찬가지다. 핏줄 승계라는 국내 재벌의 고질적 관행에서 고인 역시 벗어나지 못했던 셈이다. 고인은 승계 과정에서 세 아들 간 갈등을 지켜봐야 했으며, 심지어 둘째 아들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불법 경영이란 오명도 고인은 안고 있다. 2014년 7월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효성의 분식회계 혐의에 대해 과징금 최고한도인 20억원을 부과하며 고인을 포함해 효성 경영진에 해임 권고 조처를 내렸다. 당시 고인은 탈세·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터였다. 이 와중에도 고인은 2018년 효성그룹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고 그룹을 장남 조현준 현 회장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끝냈다. 고령과 건강상 이유로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건 2017년이다.



핏줄 승계 관행 못 벗어나
문어발 확장 탓 외환위기 때 부메랑
분식, 세금 탈루 오명



경제개혁연대가 2011년에 작성한 리포트를 보면, 1999~2000년 당시 세 아들은 특혜성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인수해 효성의 지분을 확대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또 효성의 나일론 원료 공급을 책임직 있는 카프로라는 업체의 지분을 효성이 인수하면서 신주인수권을 세 아들이 인수하도록 해 효성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줬다.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 효성아이티엑스(ITX), (주)신동진 등 비상장 회사들이 많아 일감 몰아주기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법인세 포탈과 자금 횡령 관련해 진행 중인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6년 1심 재판부는 징역 3년, 벌금 1360억원을 선고했으나 2020년 대법원에서 일부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뒤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이다.







■ 효성그룹의 앞날은?





효성그룹은 이제 조현준 회장과 조현상 부회장이 각각 독립적으로 이끄는 2개의 계열분리 지주회사 체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지주회사 전환을 마무리하며 효성그룹은 섬유·무역 부문인 효성티앤씨, 중공업과 건설을 담당하는 효성중공업, 첨단산업 자재를 생산하는 효성첨단소재, 화학 부문인 효성화학 등 4개 사업회사로 분할됐고, 이후 조현준 회장이 섬유 등 전통사업 영역에서, 조현상 부회장이 산업용 소재 부문에서 사실상 독자적으로 경영을 해왔다. 이어 효성은 2월23일 이사회에서 또 한 번의 인적 분할을 통한 신규 지주회사 ‘㈜효성신설지주’(가칭. 효성첨단소재·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HIS) 등 6개 계열사)를 설립하는 분할 계획을 결의했다. 오는 6월 임시 주주총회에서 회사 분할이 승인되면 7월1일자로 효성그룹 지배체제는 존속회사인 효성과 신설 법인인 효성신설지주로 완전 계열분리된다. 효성 지분율은 조현준 회장(21.94%)과 조현상 부회장(21.42%)이 엇비슷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3년 5월 발표한 대기업집단 순위는 31위이고 계열사는 54개다. 자산총액은 15조8770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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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전경련 회장 취임식. 조석래 명예회장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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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고인은 기술 중시 경영의 선구자로서 우리나라 섬유, 화학, 중공업 등 기간산업 발전에 초석을 놓았고, 미국·일본과의 민간 외교에도 적극 앞장서며 한국 경제의 지평을 넓히고 한국 경제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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