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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토)

전 세계 소문난 '약값 후려치기'... 한국 출시 포기 고민하는 글로벌 제약사들 [신약의 가치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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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얼마나 더 깎아야 하나>
국내 허가 4년 됐는데 못 쓰는 신약
최저가의 반값 제안에 제조사 난감
美 출시 3년 지나야 국내 환자 사용
혁신신약 느는데 약값 정책 그대로

편집자주

신약 기술력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약값이 급격히 오르고 보험 부담이 커졌다. 그렇다고 개발 속도를 늦출 순 없다.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은 높이면서 기술의 가치도 충분히 인정해 산업계의 혁신이 거듭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할 때다. 한국일보는 기술 혁신 속도를 못 따라가는 국내 약값 정책과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심층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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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에서 자란 박경자(여·70)씨는 초등학생 시절 체육시간만 되면 화장실로 숨었다. 햇볕을 쬐고 숨이 차는 운동을 하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팔다리가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박씨는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고, 속이 말갛게 비칠 만큼 부어오른 피부에 연고를 바르며 하루하루 버텼다. 병명을 알게 된 건 2001년. 나이 쉰이 넘어서였다. 목 부위로 부기가 몰리면서 숨을 못 쉬어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고, '유전성 혈관부종'이란 진단을 받았다. 국내 환자 152명뿐인 희소질환이다.

이 병에 꼭 맞는 약은 '탁자이로' 하나밖에 없다. 자신처럼 어릴 때부터 팔다리가 자주 붓던 아들은 캐나다에 살면서 다행히 2~4주마다 무료로 탁자이로 주사를 맞고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박씨는 부작용을 감수하고 남성호르몬 성분의 다른 약(다나졸)을 쓴다. 탁자이로 판매허가가 난 지 4년이 다 돼가는데도 보험 적용 가격이 결정되지 않고 있어서다.

기약 없는 줄다리기 협상에 지치는 환자들


탁자이로 주사를 1번 맞는 데 미국에선 3,972만 원, 캐나다 2,515만 원, 영국 2,097만 원, 일본에선 1,169만 원이 든다. 1년 약값이 2억~3억 원이다. 제조사인 다케다제약은 탁자이로를 한국에 출시하기 위해 건강보험 등재 조건인 경제성을 사전에 평가해봤다. 선진 8개국의 최저가보다 저렴한 가격(약 1억8,000만 원)으로 출시한다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다나졸보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기존 약의 부작용을 피할 수 있고 약효도 훨씬 좋다는 점을 강조하며 정식 건보 등재 신청 전 보건당국과 이 가격으로 사전협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신약의 효과를 높게 인정하기보다 약값을 깎는 데 집중했다. 최저가의 절반까지 깎자는 요청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출시를 포기하는 게 나은 수준이라 다케다제약은 탁자이로의 한국 시장 진출 자체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그래픽=신동준 기자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하다. 희소질환이라 경제성 평가를 면제받는 예외 트랙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탁자이로는 이마저도 불가하다. 환자가 소아일 때만 면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유전성 혈관부종 환자들이 병명을 알기까지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는 '진단 방랑'을 평균 18.5년이나 겪는 현실을 감안하면 약을 들여올 길이 사실상 막혀 있는 셈이다.

제조사와 보건당국이 약값을 놓고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4년이 흘렀다. 다케다제약은 경제성 평가 면제 기준이 소아에서 일부 성인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는 중이고, 152명의 환자는 제조사가 한국에 약 출시를 포기할까 봐 마음 졸이고 있다.

국내 허가 신약 10개 중 2개만 건보 적용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한국은 비현실적으로 약값을 깎으면서 약값 결정 제도의 유연성마저 부족한 시장이란 시각이 퍼져 있다. 유방암 신약 '엔허투'도 비슷한 상황이다. 2019년 미국 허가 후 세계 시장을 빠르게 장악한 엔허투는 2022년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정부와 제조사의 약값 협상 줄다리기가 2년째 이어지며 도입이 늦어지고 있다. 암 진행을 멈추는 기간이 기존 약보다 4배나 길다는 점이 입증됐지만 한국에선 최저가를 더 깎느라 심사가 길어지고 있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국내에서 허가받은 신약이 건보에 등재된 비중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나 G20(28%)보다 낮다. 통상 가격이 더 비싼 희소질환 신약의 경우 이 비중이 12%로, 차이(OECD 32%, G20 32%)가 더 벌어진다. 그러니 환자가 약을 쓰기까지도 오래 걸린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허가한 신약을 각국이 건보 적용 여부와 약값을 정하고 출시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미국은 평균 4개월, 독일 11개월, 일본 17개월인데, 한국은 46개월이나 된다. 미국 환자가 신약을 쓰기 시작하고 3년 이상 지나야 한국 환자들이 신약에 접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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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급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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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동준 기자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는 국내 연구진과 함께 신약의 건보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약제급여평가위원회의 공개 자료를 전수조사하고 있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중간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0년부터 4년간 건보 적용을 받은 항암신약 수는 희소질환 등의 이유로 경제성 평가를 면제받은 것까지 다 합쳐서 17개다. 같은 기간 미국에서 항암신약 58개가 허가받은 것과 비교1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국내 시판 허가를 받고도 약값 협상이 지연되는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부는 최저가를 고집하는 이유로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내세운다. 하지만 비슷한 약효의 여러 약이 난립한 가운데 가장 싼 약값을 끌어낼 필요가 있었던 과거와 달리, 대체 약이 거의 없거나 신기술이 도입된 혁신 신약이 늘면서 국내 약값 정책도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에 힘이 실린다. 이종혁 중앙대 약대 교수가 내놓은 '우리나라 신약의 약품비 지출 현황 분석 및 합리화 방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012~21년 급여된 신약 227개의 재정지출 분석 결과, 신약에 투입된 건보 재정은 총 약품비의 약 8.5%, 건강보험 총 진료비의 2.1% 수준이었다.

신약 다양성, 치료 기회 줄어들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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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앞으로 고난도 기술로 개발된 혁신 신약이 더 많이 등장할 거란 점이다. 글로벌 혁신 신약의 발전 속도를 국내 약값 평가 체계가 따라잡지 못하는 사이 피해는 환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글로벌 제약업계에서 한국은 가장 좋은 약을 선보이기보다 제도의 벽을 통과할 만한 약을 골라 보내는 시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 신약이 점점 들어오기 어려워지고 환자들 치료 기회도 줄어드는 것이다. 강혜련 서울대병원 알레르기내과 교수는 "희소질환의 경우 선행 약들의 약값 협상 지연이 누적되며 국내 출시가 선진국보다 10년 늦기도 한다"며 "약값 협상 탓에 환자가 고통받는 현실에 국제학계도 놀라워한다. 약값 정책을 환자 중심으로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최근 들어 개선책을 찾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병의 신약은 건보 등재까지 소요 기간을 단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격 책정 방식을 비롯한 전반적인 신약 도입 체계가 여전히 경직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한 글로벌 제약사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더 많은 신약이 한국 시장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 항암신약 58개가 허가받은 것과 비교
미국에선 허가와 동시에 보험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재명 기자 now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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