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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단독] 유족은 애타는데… 유사 판결문 오타까지 ‘복붙’한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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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 ‘北 자산 청구 소송’, 무성의 판결문 논란

조선일보

그래픽=송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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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사들이 ‘복붙(복사해 붙여 넣기)’ 방식으로 판결문을 쓰면서 다른 판결문에 있는 오자(誤字)까지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생겨 논란이 되고 있다. ‘뭉텅이’ 복붙으로 판결문이 너무 길어지기도 한다. 법조계에서는 “복붙 판결문은 판사가 불성실하게 재판을 한 결과물로 인식돼 판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동부지법에서 지난달에 나온 한 판결문은 작년 4월에 나온 서울고법 판결문과 거의 동일했다. 동부지법의 해당 판결은 6·25전쟁 당시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북한에 포로로 잡혀 수십 년간 강제 노역을 한 끝에 탈출한 노사홍씨와 고(故) 한재복씨 유족이 법원에 공탁돼 있는 북한 저작권료에서 손해배상금을 받게 해달라며 낸 소송에 대한 2심 선고였다. 또 서울고법 판결은 6·25전쟁 때 납북됐던 경찰관 최모씨 유족이 낸 2심 소송에 대한 것이었다. 두 판결 모두에서 납북 군경(軍警) 등이 패소했다.

조선일보

그래픽=송윤혜


동부지법 판결문은 논문 한 편을 인용하면서 저자 이름을 ‘김O현’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논문 저자는 ‘김O헌’이 맞는다. 이런 오자가 생긴 것은 동부지법 판사가 서울고법 판결문에서 해당 부분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 판결문에서 논문과 저자 이름이 나오는 문단 전체가 몇 글자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다.

또 동부지법 판결문은 핵심에 해당하는 ‘판단’ 부분의 첫 단락 2쪽 분량도 서울고법 판결문과 유사했다. ‘가’ 항목 아래 ‘1)’부터 ‘6)’까지 구성과 내용이 거의 같았다. 결과적으로 두 판결문의 분량도 각각 9쪽으로 같았고 주요 문단 구성과 표현, 최종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동부지법 2심에서 패소한 국군 포로들은 지난 2020년 7월 “북한과 김정은이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원씩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받았다. 이 배상금을 받으려고 같은 해 12월 북한 저작권료를 관리하고 있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후속 소송을 냈다. 경문협은 국내 매체들이 북한 방송 영상 등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 중 28억5000만원을 법원에 공탁해 두고 있다.

이에 대해 동부지법은 지난달 14일 2심 판결을 선고하면서 “경문협 공탁금에서 손해배상금을 추심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경문협은 북한 저작물 사용을 원하는 국내 개인이나 단체를 상대로 포괄적인 사전 협상을 할 수 있는 권한만 북한 측에서 받았고 저작권료를 외부에 지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소송에서 국군 포로 측을 대리한 구충서 변호사는 “서울고법 판결을 반박하는 취지의 자료를 통일부에서 받아서 냈지만, 동부지법 재판부는 전혀 판단하지 않았다”면서 “서울고법 판결문의 오타까지 동부지법이 복붙 하는 것은 ‘부실 재판’”이라고 했다.

‘복붙 판결문’에 대해서는 법원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 산하 사법정책연구원이 ‘판결문 작성 방식 개선’을 위해 현직 판사들을 심층 인터뷰 했더니 “법리 부분에 오자가 막 들어가 있기도 하다. 그대로 복사해서 쓰다 보니까” “뭉텅이로 딱 갖다 붙인다” “너무 복사해서 붙이고 그런 게 있다” 등의 답이 나왔다.

한 고법판사는 “본인이 쓴 판결문에서 한 단락을 복붙 해 다른 단락에 넣다가 실수한 판사도 있었다”고 했다. 판결 주문(主文)에는 ‘피고는 원고에게 1억원을 O년 O월 O일까지 지급하라’고 써야 한다. 그런데 1심 판사가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판결 이유에 쓴 부분을 그대로 복사해 주문을 잘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판결문을 항소심에서 접한 고법판사는 “이런 판결문이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2심에 올라온 건 문제”라고 했다.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판결문에 발생한 오탈자 등을 바로잡아달라는 신청이 지난 2013~2022년간 한 해 평균 1만8462건씩 접수됐다.

법원장 출신인 한 법조인은 “비슷한 사건의 판결문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오탈자까지 ‘복붙’ 하는 식은 곤란하다”며 “법원이 소송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성의 있게 재판하고 판결문도 정확하게 써야 한다”고 했다.

[방극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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