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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토)

"분내 풍기지 말고 집에나 가라!"... 여성택시기사, 희로애락 100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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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성기사 이정옥씨 이후 한 세기]
전국 2300명... 1% 안 돼도 자부심 충만
호기심에, 목돈 마련하려... 이유는 각각
희롱·무시에도 '다양한 손님' 매력 느껴
"앞으로 100년, 기사로서 존중받기를"
한국일보

한국 최초 여성 택시기사 이정옥씨를 소개한 신문 기사. 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 자


"여자가 자동차 운전을 한다면 호기심에 끌려서라도 한번씩은 타볼 게다,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1930년 대중잡지 '별건곤'의 6월 호에 여성택시기사 이정옥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신(新)여성은 2년간 산파로 일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은 데다 흥미도 없어 다른 직업을 기웃거렸다. 마침 인근에 생긴 자동차 학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별히 운전을 가르쳐주겠다'는 강사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 이씨는 덥석 핸들을 잡았고, 남성 교육생들과 똑같이 경쟁하며 당당히 운전수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때는 1920년대 중반, 대한민국 첫 여성택시기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택시업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당시 부자들을 겨냥해 미국 크라이슬러 등 고급 차종으로 운영되던 택시는 값싼 기종으로 바뀌어 대중의 발이 돼주고 있다. 1시간에 4원 하던 택시비도 기본요금만 4,800원이다.

그렇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다. 남성 기사만 가득한 택시업계에서 묵묵히 일하는 여성들의 존재다.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 택시 운전자는 23만5,962명. 이 중 여성 비율은 1%(약 2,300명)가 채 안 된다. '국제 여성의 날(8일)'을 앞둔 1일, 한 세기라는 시간의 허들을 넘어 여전히 분투 중인 이 시대 이정옥들의 희로애락을 들어봤다. 현직 여성기사 3명이 함께 했다.

나는 왜 택시 운전대를 잡았나

한국일보

지난해 3월 서울역 승차장에 택시가 줄지어 서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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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정옥씨가 그랬듯, 세 여성기사는 운명처럼 운전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40년 차 베테랑 김은자(가명·77)씨의 말이다. "대학을 가고 싶어 서울로 이사 가 인문학교에 들어갔죠. 그런데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잘 안 됐어요. 어떻게든 돈을 벌어 대학을 가겠다는 일념에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은자씨는 우연히 한 광고를 보게 된다. '4개월이면 면허증을 딸 수 있다'는 광고 문구는 단박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행은 쉽지 않았다. 여성기사가 가뭄에 콩 나듯 하던 그 시절, 부모님의 반대는 심했다. 택시업체도 채용을 꺼린 건 물론이다. "대학을 가려면 뭘 못 하겠어요. 스페어(아르바이트)로 겨우 시작했죠."

원래 잠깐만 택시를 몰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은 형편이 도통 나아지질 않았고, 어느덧 그는 두 명의 여동생을 뒷바라지하는 가장이 돼 있었다. 동생들은 언니 덕에 학업을 마쳤지만, 그토록 대학 입학을 바랐던 은자씨는 꿈을 접어야 했다.

여성기사 '커트머리'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대개는 히야카시(희롱)나 좀 하자꾸나! 이런 생각을 하고들 부릅니다그려.
이정옥씨 인터뷰 발췌
한국일보

장윤서씨가 손님을 태우고 횡단보도 앞에 잠시 정차해 있다. 장씨는 10년 차 여성택시기사다.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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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가 안 그렇겠냐만, 택시기사 일도 여성에게 녹록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얕잡아 보고, 스스럼없이 성희롱을 해대는 남성 손님을 상대해야 했다. 정옥씨는 인터뷰에서 "조수를 치워라, 내가 운전대에 앉겠다는 둥 별별 추잡스러운 농을 다 걸지요"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공무원을 관두고 택시기사를 택한 장윤서(67)씨는 올해로 10년 차다. 평소 운전을 좋아했기에 일이 고되진 않다. 하나만 빼고서다. "처음에 선배님들이 '커트머리로 자르라'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를 절절히 깨달았다. "한번은 차 안에 방향제를 뿌려놨는데, 어떤 손님이 '어디서! 분내 냄새를 풍겨. 일찍 집에나 가라!'고 소리치기도 했죠."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여성기사들이 짧은 머리를 선호한다고 윤서씨는 생각한다.

커트머리를 수십 년간 고수해 온 50년 차 택시기사 김종남(72)씨도 오래전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서울 신림동에서 경기 의왕시 부곡동으로 가는 손님이었어. 따블(2배)을 주겠다는 거야. 졸린 눈을 부여잡고 도착했더니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 하더라고." 역시나 손님은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형광등을 꺼버렸다. "그때 알았어, 당했구나. 분을 삭이다 문짝을 발로 차버렸어. 계속 차면서 '돈은 내놔야 될 거 아니야' 소리쳤지." 그간 자신을 조롱했던 수많은 손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쌓인 울분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그래도 택시기사 일은 '즐겁다'

남자 운전수한테는 1원 한 장을 내고 꼭 거슬러받지마는, 내가 할 때는 신사가 1원한장 여자한테 내밀고 20전받으랴고 서잇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대개는 1원을 그대로 주고 내립니다.
동아일보 1936년 1월 3일자 신문
한국일보

50년 차 여성택시기사 김종남(왼쪽)씨가 동료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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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택시의 매력 때문이다. 정옥씨는 100년 전 차별을 받을 때 상대의 뺨을 때리고 싶을 정도로 속상하다 했지만, 종종 손님들의 바보 같은 모습을 보며 재미를 느꼈다고 했다. 좋아하는 택시 일에 흠뻑 빠져 결국 '동양택시'라는 회사를 인수해 차량 10대를 거느린 사장님까지 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핸들을 잡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 즐겁다. "사람 보는 눈이 달라져. 관상가가 된다니까." 종남씨가 입을 뗐다. 1980년대 초 서울 청량리에서 짙은 색 옷을 맞춰 입은 장정 4명을 태운 날이었다. 백미러로 흘끔흘끔 동태를 주시하던 종남씨는 이들이 한 건물을 지칭하며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했다. "강도짓을 하려는구나." 확신이 들자 꾀를 냈다. 운행 도중 몰래 시동을 꺼버리고 손님들에게 차를 밀어달라 청했다. "옛날에는 시동이 꺼지면 차를 밀어야 굴러갔거든. 4명이 다 내리더라고. 그래서 그냥 출발했지(웃음)." 여성택시기사 3명은 손님들을 중매해 준 이야기, 손님을 태우러 구치소에 갔던 이야기 등을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100년 뒤엔 여성 수식어 사라지길"

"전 같으면 여자운전수노릇을 하는일이 없었으나 오늘에 와서 점점 늘어가는 이 쯤에 있으니까, 앞으로 이 자동차부를 순연히 여자로서 구성해 놓고자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1932년 1월 2일자 신문
한국일보

한국 최초 여성택시기사 이정옥씨. 1932년 1월 2일자 조선일보


다시 100년이 지난 2124년에도 여성택시기사들은 활동할 것이다. 그 때는 좀 더 사정이 나아질까. 정옥씨는 "앞으로 여성택시기사 수가 늘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는 하나다. 택시기사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떼 버리는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온전히 택시기사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은자씨는 "여성이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에 여성기사가 마음 놓고 사용 가능한 공중화장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여자화장실 문은 대부분 잠가놓는 탓이다.

윤서씨도 거들었다. "다음 100년 뒤엔 여성 기사님들이 더 이상 희롱 안 당하고,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기사로서 존중받는 사회가 돼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서현 기자 he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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