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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1 (일)

[만물상] AI에 밀려나는 어문학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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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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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비결로 어학을 통한 선진 문명 학습이 꼽힌다.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워 앞선 의학과 선박 제조 기술을 익혔다. 19세기 영국과 미국 전함의 위용을 잇달아 목격한 뒤엔 영어로 방향을 틀었다. 막부는 네덜란드어만 알던 통역관들에게 “목숨 걸고 영어를 배우라”고 명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나선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구한말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개화하려면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고종에게 권해 1898년 한성에 독일어학교를 세웠다.

▶신생 대한민국의 외국어 학습 열망도 뜨거웠다. 8·15 해방 직후 교육과정에 영어·독어·불어·중국어가 포함됐다. 1969년엔 스페인어가, 1973년엔 일본어가 추가됐다. 1960~70년대 중고생 사이엔 “단어를 외우고 나면 사전을 찢어 씹어 먹었다”는 외국어 공부 무용담이 돌았다. “영어 발음 잘해야 한다”며 아이들 혀 밑 설소대를 절개하는 황당한 수술이 한때 유행했던 것도 외국어 학습 열풍이 빚은 그늘이다.

▶언젠가부터 외국어 열풍이 수그러들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제2외국어가 대입 필수 과목에서 제외되더니 지금은 ‘제2외국어는 서울대 입학용’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1980년대까지 ‘학문의 언어’와 ‘외교 언어’로 인기 있던 독어와 불어가 먼저 퇴조했다. 두 언어를 밀어내고 1990년대 인기를 누렸던 중국어와 일본어도 요즘엔 동양어문학부로 통폐합되거나 아예 없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2013~2022년 4년제 대학의 학과 변동 추이를 조사했더니 인문계 학과 정원이 어문계 중심으로 20%나 감소했다. 이 기간 중국어과 36개, 일어과 27개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됐다. 대학마다 어문 계열 학과의 폐과나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해당 학과의 교수와 학생이 대학 당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는 일이 반복된다. 대학은 대학대로 사회적 수요가 줄어들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SF 소설가 듀나가 2016년 발표한 단편 ‘추억충’은 인공지능 시대에 외국어 학습 미래를 내다본 작품이다. 소설에서 번역가인 윤정은 20년 전만 해도 모든 작업을 직접 했지만 지금은 70%를 기계에 맡긴다. 그녀는 생각한다. ‘앞으로 20년이 더 지나면 이 직업은 존재하기는 할까.’ 소설 속 미래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휴대전화에 관련 앱만 깔면 서로의 언어를 몰라도 대화가 가능해졌다. 실시간 동시통역이 가능한 AI 스마트폰까지 나왔다. 덮쳐 오는 거대한 AI의 쓰나미 앞에서 어문 계열 학과가 존폐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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