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5 (월)

[6411의 목소리]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신발 만드는 공정 중 가죽작업 모습입니다. 저희는 ‘가피’라고 하지요. 신발 윗부분 가죽을 재봉질로 조립하는 과정으로 여기에 밑창을 붙이면 신발이 됩니다. 필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이창열 | 제화노동자·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성수분회장



벌써 4년이나 됐다. 딸이 결혼하는데 새하얀 웨딩슈즈를 만들었다. 나는 재단된 가죽을 재봉질하는 갑피 기술자라 다른 작업은 동료들이 했다. 딸이 좋아했다. 그렇다고 구두장이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봉제 일을 했으면 옷을 선물했을 거고, 보석 가게를 했으면 다이아를 줬겠지. 내가 만들 줄 아는 게 구두라 당연한 거였다.



부모님은 기술을 배우면 굶지는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다그쳤다. 서울 정동에 살았는데, 동네 선배가 구두 일을 했다. 1980년대 초 10대 후반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이 무지 힘들었다.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게 싫어 몇번 도망치기도 했다.



사우디 가겠다고 중장비 자격증을 땄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못 갔다. 용접 자격증도 있는데 썩혔다. 서점 일도 했고, 막노동도 뛰었다. 엑스트라도 해봤다. 엠비시(MBC)가 정동에 있던 시절, 6·25 특집극에 총살당한 시체나 기차역 앞에서 종일 군가 부르는 병사로 출연했다. 재미는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했어도 구두장이 선배가 불러 술 사주고 용돈 주면 그 맛에 빠져 또 돌아갔다. 결국 구두를 만들게 됐다.



‘구두장이가 되자’ 마음을 잡고 나서는 이왕이면 빨리 기술을 배우기로 작정했다. 어떤 기술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년6개월 만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5천원짜리 공임이면 딱 그만큼 하는 중간 정도 기술로 시작했는데, 세월 낭비하지 않고 나만의 비법을 차곡차곡 쌓았다.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린 1986년, 그땐 일감이 넘쳐났다. 어지간한 월급쟁이의 두배는 벌었는데,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장에서 가죽 깔고 자면서 하루 20시간씩 일한 근로시간을 따지지 않았다는 걸. 구두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개수임금제다. 만드는 만큼 돈을 받으니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교장’이라고 불리는 관리자가 일감을 배분하는데, 말을 안 듣고 덤비면 일감을 적게 또 어려운 걸 준다. 이렇게 길들인다.



노동조합은 아니다 싶었다. 애들 엄마가 스티커 만드는 조그만 공장에 다녔다. 사장이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려고 30~40명을 자르려고 해서 노조에 가입해 싸웠다고 했다. 나한테는 철저히 숨겼다. 내 성향을 아니까. 집에서 전기장판, 이불을 들고 나가 안 가져오는 건 알았다. 나중에 금속노조에서 만든 투쟁 영상을 보니 애들 엄마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 사장 아들이 한 행동을 보니 돌아버리겠더라.



2018년부터 탠디 하청업체 제화노동자들이 공임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하고 본사를 점거해 농성했다. 이겼다. 구두 만드는 사람들이 아는 게 없으니까 도움을 받으려고 노조에 가입했다. 불이 붙었다. 거긴 사당동인데 노조가 성수동에 와서 홍보하고 그러길래 어영부영 가봤다. 얘기 들어보니 필요하다 싶었다. 2019년 반신반의하면서 노조 가입원서를 썼다.



노조가 생기자 사장이나 관리자들이 조심했다. 퇴직금 얘기도 나왔다. 이런 대접은 못 받아 봤다. 나서면 된다는 성취감 같은 걸 느꼈다. 그때는 분위기에 휩쓸린 면도 있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열성적으로 빠져들었다.



아파트 경비노동자나 학교 비정규직들이 집회하면 우리 제화지부에서 도와주러 달려갔다. 일이 안 끝나면 할 수 없지만 좀 빨리 끝낼 수 있으면 막 쫓아갔다. 우리가 힘들 땐 그들이 도와주러 달려온다. 남을 위한다는 거, 내가 이런 걸 언제 또 해보겠냐 싶어서 뿌듯했다.



한 40년 구두 만들면서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백화점에 납품할 정도 수준의 구두를 값은 3분의 1만 받고 파는 거였다. 일하는 사람도 개수임금제가 아니라 월급쟁이로 하고. 협동조합식으로 공동투자하자며 동료들을 꽤 포섭했다. 하지만 끝내 성사되지는 못했다. 내 뒷심이 부족해서였다. 안타깝다.



그래도 소신껏 살아보니 좋다. 결혼하고 애들 태어나고 학교 보내고 돈 들어갈 때부터는 공장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일이 아니려니 했다. 그만두고 다른 공장으로 옮기면 됐다. 애들이 학교 졸업하고 직장 들어가고 나니 홀가분해졌던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장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원칙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잘못하고 있다 싶으면 나도 덤비고 싸운다. 후배들이 일할 환경을 선배들이 일찌감치 다져놓지 못한 거, 이게 늘 마음에 걸린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한겨레의 벗이 되어주세요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