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이대로라면 한국은 일본과 비교 불가다. 한국 증시는 일본에 10년 뒤처졌다. (제이미 로젠월드 돌턴인베스트먼트 CIO) "
2024년 한국 증시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20년 넘게 지적돼 온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날아 오를지, 저평가의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 들 지다.
지난달 24일 금융위원회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뒤 코스피는 2400선에서 단숨에 2620.32(8일 종가 기준)까지 상승했다. 이 기간 외국인 자금도 5조원 가량 들어왔다.
12일 세계 3대 연기금 운용사인 네덜란드연기금운용사(APG)의 박유경 아시아 책임투자 총괄담당(전무)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증시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이번 (증시부양 정책)기회가 무산되면 한국 증시 개선의 길은 요원하고,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 글로벌 자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
기업은 1류, 증시는 3류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올해 1월 말 기준 0.9 배다. PBR은 시가총액을 순자산으로 나눈 지표다. 코스피 PBR이 1보다 낮다는 건 한국 상장사 주식이 기업이 보유한 순자산가치보다도 싸게 거래된다는 의미다. 이웃나라 일본은 PBR 2배로 한국보다 두 배나 비싼 대우를 받는다. 지정학적 긴장도가 한국 못지 않은 대만(2.13배)은 물론, 금융시장 개방이 더딘 중국조차 1.2배다. 한국보다 낮은 대접을 받는 증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및 주요 국가 36개 중 콜롬비아(0.7배) 하나 뿐이다.
김경진 기자 |
한국과 경쟁하는 외국 기업들을 비교해 봐도 ‘디스카운트’ 현상은 뚜렷하다. 삼성전자 PBR은 1.1배로 대만의 TSMC(4배) 애플(39.4배)보다 한참 낮고, 현대자동차(0.5배) 역시 도요타(0.9배) 포드(1.1배)의 절반 수준이다. 각국 증시를 대표하는 시가총액 20위 기업 중에 PBR 1배 미만인 기업이 미국은 하나도 없고 대만은 1개, 일본은 6개에 불과한데 한국은 12개나 된다.
이남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는 “국내 기업들의 제품은 1류인데 자본시장에서는 3류 취급을 받는다”며 “건전한 자본시장 없이 기업 경쟁력이 유지되기 힘든 만큼 지금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차준홍 기자 |
━
2200만명 가입 국민연금도 피해자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단순히 개인투자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2023년 기준 가입자 2225만명)은 국내 증시에 15.4%(2024년)를 투자해야 한다. 중동 국부펀드 등 해외 주요 투자자 자금을 운용하는 페트라자산운용이 각국의 MSCI 지수를 기준으로 최근 10년(2013~2023년) 수익률을 구해 적용해보니, 2013년 국민연금이 국내에 투자했던 84조원은 10년 사이 101조원으로 1.2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이 돈을 미국 증시에 투자했다면 260조(3.1배), 대만에 투자했으면 269조(3.2배)로 불어난다. 저평가된 증시로 전 국민이 약 160조를 손해를 본 셈이다.
차준홍 기자 |
미국계 투자사인 돌턴인베스트먼트의 제이미 로젠월드 최고투자책임자(CIO)가 “일본에 50년, 한국에 20년 동안 투자해 왔지만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이 현상(증시저평가)을 용인하는 한국 소액주주와 국민들”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
주주환원 미흡하고 투자성과도 ‘글쎄’
한국 증시는 왜 유독 저평가된 걸까. 물건 값이 싼 이유는 간단하다. 값어치를 못해서다.
이찬형 페트라자산운용 부사장은 “기업에 투자를 했는데 이익도 안 나눠주고(배당), 경영에 대한 권리도 없고(이사회 작동 미흡), 심지어 투자금은 점점 사라진다(주가 하락)”며 “한 마디로 한국 주식은 비정상”이라고 지적했다.
기업이 성장하면 투자한 모든 주주가 과실을 누려야 하는데, 한국 주식은 그렇지 않다. 배당이 없거나 적고,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주가 부양도 하지 않는다. KB증권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 10년(2013~2022년) 주주환원율은 29%로 선진국(68%)은 물론 중국(32%)에도 못 미친다. 주주환원율이란 기업이 벌어들인 순이익에서 배당을 주거나 자사주를 사는 비율을 가리킨다.
김경진 기자 |
그렇다고 주주에게 돌아가지 않은 돈이 효과적으로 투자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 기업이 자기자본을 활용해 1년 간 얼마를 벌었는지 보여주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이를 증명한다. 테슬라의 경우 공격적인 투자로 인해 주주환원율이 0%다. 하지만 효율적인 투자로 돈을 많이 벌어 ROE가 33.6%에 달하고 주가를 끌어올린다. 반면 현대자동차의 경우 주주환원율이 27.2%로 도요타(41.8%)보다 낮고, ROE 역시 9.4%로 테슬라(33.6%) 보다 한참 아래다.
목대균 KCGI 자산운용 CIO는 “주주에게 이익을 공유하지도, 좋은 투자처를 찾지도 못하고 돈을 쌓아만 두고 있다는 시그널이 될 수 있고, PBR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자금조달 시장이 기업 성장 가로막는다?
무엇보다 저평가된 증시는 혁신 기업의 성장을 막는다. 주가가 싸면 기업이 같은 금액을 조달하려 해도 더 많은 주식을 발행해야 하므로 자금조달 비용이 비싸진다. 기업공개(IPO) 실적이 경쟁국 증시보다 못하니 벤처캐피탈 등이 스타트업, 혁신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다. 박유경 전무는 “주가가 저평가 돼 있으니 신주발행을 통한 인수합병(M&A)이 불가능하다. 적극적인 투자로 경쟁기업과 격차를 벌려야 할 때 오히려 뒤처지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성장이 절실한 신생 기업은 한국을 떠난다. 나스닥에 상장해 시가총액 72조원을 인정받은 뒤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쿠팡이 대표적이다. 셀트리온도 최근 “자금 확보를 위해 셀트리온 홀딩스의 나스닥 상장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저평가된 증시는 ‘국가의 자산배분’ 왜곡이라는 부작용도 낳는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 비중은 실물자산(부동산)이 7, 금융자산이 3이다. 이승훈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국민들이 주식투자로 정당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면 부동산 쏠림은 훨씬 덜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의 증시 저평가 해소 의지를 환영하면서도 ▶상법상 이사회의 주주이익 충실 의무화 ▶자사주 매입 후 자동 소각 등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기업에 대한 명확한 인센티브와 패널티 부과 등을 성공의 열쇠로 꼽았다.
로젠월드 CIO는 “상속세가 더 이상 지배주주의 저(低)주가 유인이 되지 않게 세제를 고치고, 주주환원을 장려하기 위해 세제 혜택도 필요하다”며 “동시에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마련하고 이에 못 미치면 등급을 강등하고, 이사회가 회사 뿐 아니라 주주의 이익도 보호하도록 상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유경 전무도 “대규모 거래와 주식발생, 경영진 보수 등 주주총회 결의 의무사안을 늘려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한국 정부가 정책 추진 의지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상속세 폐지로만 끝나면 실패, 이번 기회 놓치면 개선 요원”
박유경 전무는 세계 3대 연기금 운용사 중 하나인 네덜란드 연금 자산운용(APG·All Pensions Group)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투자를 총괄하고 있다. APG에서 15년간 한국·일본 등 아시아 기업들의 의사결정과 주주정책을 지켜봐 왔다. 지난 2015년 3월에는 현대차 주주총회 당시 특별 발언을 통해 이사회에 거버넌스 위원회를 설치하라는 요구도 했었다.
제이미 로젠월드 돌턴 인베스트먼트 CIO |
Q : 최근 일본과 한국 시장을 비교해 본다면.
A : 이번에 한국과 일본을 모두 다녀와 많은 투자자들을 만났습니다. 현재 한국은 일본에 비해 10년은 뒤처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서야 효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은 2014년부터 증시 개선 노력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해서 안 되니 계속 더하고 더해, 그게 쌓여 지금 일본 증시의 매력도를 높였습니다. 그 결과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 지금 당장 한국은 일본에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 수준입니다.
Q :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 한국 증시의 매력은 왜 떨어지나.
A : 한국 기업은 다 잘하는데 주주가치 경영만 못 하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고 이를 국민과 소액주주들이 용인하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기업들이 투자할 때 자본비용(cost of capital)을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주주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서도 중요한데 주먹구구식으로 되고 있습니다. 최대 주주 단독으로 결정되는 것도 많고, 경영진이 감으로 투자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한국도 일본처럼 기업이 자본비용, 자본수익률 및 그에 따른 자본 배분을 정기적으로 계산한 뒤 공시 및 설명하도록 시장 참여자들이 압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한국 기업의 기업재무 및 자본배분 역량도 향상시킬 겁니다.
Q :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를 위해 필수적인 정책은 무엇일까.
기업들의 행동 변화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인센티브와 패널티가 있어야 합니다. 상속세율 인하, 과세 기준 변경 등을 통해 상속세 탓에 지배주주·경영진이 저(低)주가를 선호하지 않도록 세제를 변경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일본처럼 경영진과 임직원에게 조건부 주식을 제공하고 주주환원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세제 혜택 인센티브도 필요합니다. 적대적인 인수가 시도될 경우 정부가 우수한 기업 지배구조 입증하는 기업에게 경영권 방어를 지원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다만 최근 거론이 되고 있는 포이즌 필이나 기타 경영권 방어 수단을 허용하는 것은 ISS(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등이 가장 부정적으로 경고하는 사항 중 하나여서, 한국 기업 지배구조에 타격을 줄 수 있어 우려됩니다.
인센티브와 동시에 주주권한을 해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법률도 병행돼야 합니다. M&A시 모든 주식을 의무적으로 공개매수 하거나, 자사주는 모든 주주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자동 소각하는 등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거래소 등에서 위에서 언급한 항목들을 얼마나 잘 이행했는지에 따라 등급을 만들어 기업을 강등하거나 승격시키는 방안도 도움이 됩니다. 일본처럼 정부가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을 제정해 일반 원칙(주주의 권리와 평등한 대우 보장, 이사회의 책임, 주주와의 대화 등)을 규정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상법을 개정하여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뿐만 아니라 주주의 비례적 이익도 포함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Q : 한국이 일본처럼 증시 환경 개선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보나요
A : 핵심은 지배주주·경영진과 소액주주 간의 이해관계 조율입니다. 일본 정부는 의지가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의지도 그 정도일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한국 경제와 기업은 주주가치 중심 경영과 선진화된 기업재무 및 자본배분이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지금이 한국 증시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고 성공한다면 전환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연주 기자 kim.yeonjoo@joongang.co.kr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