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만 해도 여야는 극적인 합의를 이루는 듯했다. 민주당이 그간 협상 조건으로 내건 산업안전보건청(산안청) 설치 요구에 대해 대통령실이 이날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한 데 이어,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이날 오전 “명칭을 산업안전보건지원청으로 바꾸고 조사 권한을 제외한 예방·지원 조직으로 설치하자는 협상안을 제시했다”고 밝혀서다.
꽉 막혔던 물밑 협상도 전날 밤부터 급진전됐었다고 한다. “오후 본회의에서 중대재해법과 산안청 설치를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처리될 수 있다”(국회 관계자)는 전망도 나왔다.
협상의 유효기간은 한나절도 안 됐다. 이날 오후 민주당 의원총회에선 “정부·여당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했다”고 결론났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브리핑에서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생명, 안전이 더 우선한다는 기본 가치에 충실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초 민주당은 산안청 설치를 유예조건으로 내걸었다. 홍 원내대표는 지난해 11월 말 “유예 논의를 위해 산안청을 포함한 계획을 여당이 갖고 오라”고 협상 카드를 제시했고, 전날(1월 31일)에도 “(유예 협상의) 핵심은 산안청 설치” “(유예 시) 2년간 가장 중요한 것은 산안청 설립”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강경파의 반발이 거셌다. 노동계 출신 의원은 “노동자가 현장에서 너무 많이 죽어간다. 즉시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자”고 말했다. “산안청의 조사 권한을 빼자는 여당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3선 의원)거나 “현장에서는 중대재해법으로 처벌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수도권 의원)는 주장도 이어졌다. 반면에 “노동과 자본의 대립으로만 보지 말고 현실에 맞춰 법 적용을 유예하자”(수도권 재선)는 주장은 소수에 그쳤다. 이날 의총장 앞에서 정의당·민주노총 등 관계자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며 민주당 의원을 붙잡고 “유예는 안 된다”고 촉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10 총선이 다가오면서 민주당이 강경파에 휘둘리는 일이 더 늘어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이런 협상을 걷어차면 어쩌자는 거냐”며 “경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의총만 열면 강경파가 주도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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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야당, 83만 중기·자영업자 기만”… 민주당 내부 ‘총선 악재’ 우려
초선 의원은 “공천을 앞둔 예민한 시기에 당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노동계의 반발을 무릅쓸 의원이 있겠나”라고 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입장도 결론에 영향을 미쳤다. 이 대표는 2022년 11월 한국노총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 “산업재해 사고와 관련해 현실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대재해처벌법 개악 움직임이 있다는 점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며 “개악 저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야권 관계자는 “최근 이 대표가 원내 지도부에 합의를 만류하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직접 입장을 표명했다. 윤 대통령은 “끝내 민생을 외면했다”며 “여당 원내대표가 민주당이 그동안 요구해 온 산업안전보건청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거부한 것은 결국 민생보다 정략적으로 지지층의 표심을 선택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김수경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으로 전했다. 이어 “83만 영세사업자의 절박한 호소와 수백만 근로자의 일자리를 어떻게 이토록 외면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국회 로텐더홀에서 규탄대회를 열었다. 윤 원내대표는 “조건을 내걸며 유예해 줄 것처럼 하더니 83만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 800만 근로자의 삶의 현장을 인질 삼아 희망 고문하고 기만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총선 악재’라는 탄식이 나왔다. 한 수도권 의원은 “우리가 제시한 협상안을 스스로 걷어찬 모양새”(수도권 지역 의원)라고 말했고, 중진 의원은 “산업 현장은 외면하고 노조 눈치만 보는 당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손국희·강보현·김정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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