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조선왕조 500년'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무거워서일까. 궁이라는 유적은 서울 한가운데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호기롭게 입장했다가도 그저 꽃구경만 하다 안내판의 한자투성이 설명에 압도돼 슬쩍 나와버리기 일쑤다. 꼭 조선의 역사를 다 알아야만 궁을 즐길 수 있나? 그저 뒤뜰을 거닐 듯, 모델하우스나 인테리어 숍 둘러보듯 구경하면 안 될까? 막연히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던 궁궐에도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표정들이 곳곳에 잔뜩 숨어있다는 걸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었다는 김서울 작가의 안내를 따라 궁을 거닐어보자. 섬세하고 유쾌한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궁이라는 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공간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동시에 조선시대와 조선시대 왕궁을 향해 가졌던 오랜 오해와 편견을 풀게 될 것이다. 글자 수 1058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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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에 우리가 만나는 서울의 궁궐 중 물이 흐르는 곳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의 조상님들은 모든 궁에 배산임수의 지형을 축소해 넣기 위해 어떻게든 물길을 끌어와 입구에 수로를 만들고 온갖 깜찍한 돌짐승을 토핑으로 얹은 다리를 정성스레 만들었지만 현재 궁궐 입구의 다리 아래는 대부분 바짝 말라 있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보송하다 못해 버석한 돌바닥이 관람객을 맞는 것이다. 공간 자체가 문화재인 궁궐이기에 보존을 위해서는 보송함을 유지하는 쪽이 유리하지만 이런 환경은 한편으로 돌다리의 원래 쓰임과 그 주변 풍경을 잊게 한다.
그런데 창경궁에는 물이 흐른다. 창덕궁 후원 안쪽에서도 물이 흐르는 옥류천을 볼 수 있지만 궁궐 정문과 전각 곁에 물이 흐르는 곳은 창경궁이 유일하다. 연못은 다른 궁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고여 있는 물은 흐르는 물처럼 주위 풍경에 생동감을 더하지는 못한다. 연못이 멋진 풍경이 되는 순간도 멈춰 있던 물의 표면이 바람을 받아 흔들리며 윤슬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바로 옥천교가 보인다. 그 아래 흐르는 물은 궁 뒤편의 연못 춘당지와 연결되고 춘당지 뒤로 후원을 따라 물길을 쭉 연결하면 북악산에 닿는다. 산골짜기를 따라 흘러 내려온 물이 작은 연못을 만들고 나무와 들꽃 옆으로 소리를 내며 고궁 풍경에 촉촉함을 더하는 것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있다 보면 여간해서는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 어려운데 궁궐처럼 자연스레 노이즈캔슬링이 되는 환경이라면 고요 속에서 작게나마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덤으로 그 물길을 졸졸 따라가다 보면 물가에서 여유를 즐기는 작은 동물 친구들도 만나게 된다. 수로 옆 관목 사이에서 햇볕을 즐기며 뒹굴거리는, 유난히 몸집이 작은 창경궁 고양이들과 그런 고양이의 눈치를 보다 수로에 내려앉아 목욕을 즐기는 작은 새들.
거기다 흐르는 물은 돌다리의 원래 쓰임을 상기시켜 준다. 다른 궁에서는 그저 길이나 바닥의 일부 같았던 돌다리가 물이 있으니 실제 다리로 사용되는 것이다. 문화재나 유적 하면 대개 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흐르는 물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훨씬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 된달까.
-김서울,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놀, 1만5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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