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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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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대령의 든든한 뒷배, 해병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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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하복보다 정의와 자유가 우선…예비역까지 “진상규명” 촉구

경향신문

해병대 예비역들이 지난해 11월 5일 서울 용산 국방부청사 부근에서 해병대 군가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전날 경기도 화성 해병대사령부에서 출발해 국방부청사까지 50㎞를 행군했다. 행군 도중 시민들로부터 메모지에 지지 서명을 받아 채 해병과 박정훈 대령의 이름을 쓴 펼침막을 만들었다. 김창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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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개가 또 있을까. 해병대 장병의 사망 사고가 벌어졌고, 수사책임자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려 했다. 일단 사건이 있으면 덮기 급급하던 군에서는 못 보던 일이다. 더 놀라운 건 수사책임자가 항명죄로 입건되자 그 부하들이 직을 걸고 상관의 무고함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급기야 전역한 예비역 해병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엔 지난해 전역한 MZ세대 해병 장교도 있고, 28년 전 3개월간 수사책임자와 동고동락한 동기들도 있으며, 군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월남전 참전 노병도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이름은 해병뿐이다. 조사를 둘러싸고 정권 차원의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나오는데도, 그 반대편에 선 예비역의 대오는 흔들림이 없다.

“진상규명”이라는 요구 아래 사람들을 모으고, 집회 등 행사를 기획하고, 1박2일 행군에 나서는 일은 생업을 가진 이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예비역 해병은 “역시 해병대라는 말을 듣고 싶다(905기 해병 안신현)”고 했다. 세대도, 정치색도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 해병이란, 해병대 정신이란 무엇인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경향신문

지난해 9월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해병대 예비역들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해병대의 상징인 빨간 티셔츠를 입은 예비역 해병 400여명이 참석했다. 김세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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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해병대 정신 때문이 아니에요.”

해병대 1158기 정원철 해병은 지난해 8월 중순 채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을 개설했다. 그는 전역 후 전우회 활동을 하거나 ‘해부심(해병대라는 자부심)’을 부리던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해병대 예비역들 모여 있으면 서로 ‘내가 더 힘들었다’ 자랑하는데 내가 당한 악습이 무슨 자랑거리예요. 북한을 덜덜 떨게 하는 게 멋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가 오픈채팅방을 만든 건 채 상병 때문이다. 정 해병은 늦둥이, 외동아들이다. 수차례 시험관 시술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는 채 상병의 일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는 “우리 집에 대입해 봤는데, 제가 없다면 우리 집도 초상집이죠. 그 마음이 컸어요”라고 했다.

해병대 예비역을 대표하는 공식단체 해병대전우회가 지난해 8월 낸 성명이 행동에 나서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채수근 상병의 사고를 조사하던 박정훈 대령은 수사 자료를 경찰에 이첩했다가 ‘집단항명수괴죄’로 입건됐다. 국방부 장관은 수사 자료를 경찰에 넘기겠다는 내용이 담긴 박 대령의 수사보고서에 사인했다가, 이틀날 돌연 이를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국방부 장관보다도 윗선의 수사 외압을 의심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해병대전우회는 “외부개입 없이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군이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점잖은 성명을 냈다. 이 성명을 예비역 해병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전우회 홈페이지에 달린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관망하는 제 3자의 입장문처럼 보인다” “해병대 전 가족들이 분개하고 있는 게 안보이느냐”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정 해병은 “전우회가 밖에 나가서는 봉사활동도 참 많이 하는 가장인데 집 안에 제 자식은 안돌본다”고 느꼈다. 해병대 정신 때문에 나선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얼굴도 모르는 채 상병의 죽음도, 개인적 연이 없는 박 대령의 고난도 제 가족의 일처럼 바라봤다.

정원철 해병이 지난 1월 2일 대전 국립현충원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채 상병에 대한 참배를 요구했을 때, 최병태 해병(76)도 그 곁에 있었다. 그사이 정 해병이 개설한 오픈채팅방은 ‘해병대 예비역 전국연대’라는 이름의 단체가 됐다. 600여명의 해병이 가입했다. 해병대 부사관 78기로 전역한 지 반세기가 다 돼가는 최 해병도 그 중 한명이었다. 인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최 해병은 채 상병의 생일이던 이날 가게 문을 닫고 대전을 찾았다. 그는 “우리 후배가 억울하게 사망한 일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날 정원철 해병의 참배 요구에 한동훈 위원장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 해병은 “한 위원장이 그날 거기 오는 줄도 몰랐다. 기왕 왔으면 몇 발짝만 가면 되는데 못 들은 체하고 가더라. 채 해병 사건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고 했다.

최 해병은 1970년대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파병돼 분대장으로서 대원들과 몇차례 전투를 수행했다. 그는 “자기 부하를 부모 같은 마음으로 아끼고, 대원 잘못도 책임지는 게 해병 지휘관이다. 아랫사람 책임으로 미룬다면 지휘관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이번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에는 채 상병 소속 부대의 최고 책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소장)이 있다. 박 대령은 당초 임 사단장 등 지휘관 8명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다고 봤다. 그를 보직해임하고 이 사건을 재조사한 국방부는 그러나 임 사단장의 이름을 빼고 대대장 2명의 혐의만을 적시한 수사기록을 경찰에 넘겼다. 외압이 있었다면, 그 목적은 ‘임성근 구하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에 입건된 대대장은 채 상병 사고의 원인인 수중수색이 임 사단장의 지시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임 사단장은 ‘수중수색 중인 걸 알지도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해병 장교로 전역한 20대 A해병은 임성근 당시 1사단장 휘하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해병대 1사단이 경북 예천의 실종자 수색에 투입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경북 예천에는 육군 부대가 이미 주둔하고 있는 데다, 해병대 1사단이 있는 포항에서 예천까지의 거리도 그리 가깝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관은 ‘지난해 1사단이 성공적으로 작전을 했기에 그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대민지원을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2022년 태풍으로 인해 포항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물에 잠기는 일이 발생하자, 해병대 1사단은 상륙장갑차를 투입해 성공적으로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지난해에도 상륙장갑차가 포항에서 예천까지 이동했지만, 급류로 인해 작전에 투입되지도 못했다. A 해병은 “사단장 지시 없이 부대가 타 도시로 이동해서 대민지원하기는 쉽지 않다. 대대장들 잘못도 있겠지만 부대가 예천에 투입되게 한 사단장 잘못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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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순직 사건을 수사하다 해임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지난해 9월 4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보직해임 집행정지 신청 첫 심문에 출석하고 있다. 박 대령의 해병대 사관 81기 동기들도 이날 동행해 박 대령을 응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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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군기가 강한 부대다. 전역 후에도 기수로 선후배를 가린다. 군기의 핵심을 상명하복이라 할 때, 박 대령은 상부 지시를 불이행한 군인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해병들은 하나 같이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를 얘기했다. 이 문구는 금색 닻 위에 은빛 독수리가 앉아 있는 해병대 마크에도 담긴 문구로, 해병대가 존재하는 목적을 의미한다.

정원철 해병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구전되는 부마항쟁 진압작전 이야기를 꺼냈다. 1979년 부마항쟁 당시 시위진압을 위해 부산에 투입된 박구일 해병대 7연대장은 대원들에게 ‘시민들이 때려도 맞아라. 총기만 빼앗기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 해병은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지시 불이행이거든요. 그렇지만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라는 해병대 정신에 부합하는 거죠. 잘못된 지시는 따르지 않는 게 상식이죠”라고 했다.

김태성 해병대 사관 81기 동기회장(50)은 “윗사람의 잘못을 덮으라는 명령을 따르라는 건 해병대 정신이 아니다. 해병대 정신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정신이지, 맹목적 충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 대령과는 해병대 사관 동기인 김태성 회장은 해병대 예비역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도록 가슴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지난해 8월11일 박정훈 대령이 국방부 검찰단에 출석할 때 동행해 우산을 받쳐준 것을 시작으로 이 일에 발을 들였다. 이후 동기들과 함께 성명서를 내고,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박정훈 대령이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심문)를 받기 위해 군사법정에 출석할 때는 동기들과 함께 찾아가 해병대 군가 ‘팔각모 사나이’를 불렀고, 지난해 11월에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1박2일간 50km를 행군했다.

박 대령과는 별 친분도 없었다. 1996년 3개월간 훈련을 같이 받은게 인연의 전부다. 그 스스로 말하듯 처음엔 단순히 “오지랖”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속 밝혀지는 사실관계는 박 대령이 잘못한게 없다는 확신을 줬다. 박 대령 휘하의 중앙수사대장(중령), 1광역수사대장(중령), 수사지도관(준위) 등은 모두 군검찰 조사에서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제외하라’는 취지의 외압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김태성 회장은 “잘못되면 군생활이 끝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증언을 했다. 자기 목을 건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이 사건에 대한 특검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73%가 나왔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 상식선을 넘어서 있기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이다”라고 했다.

전국연대에서 각종 행사의 물품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905기 안신현 해병(44)은 21대 국회 회기가 종료되기 전에 채 상병 사건에 대한 특검법이 통과되길 원한다. 군 장병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본다. 회사일을 마치고 밤늦게까지 전국연대 집행부 회의를 이어가야 하는 그로서는 “얼른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도 있다. 그는 “해병대의 명예가 무너져 가는 게 싫어 나서기도 했지만, 제 자식이 가야하는 군대일 수 있다는 생각도 컸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태성 회장은 장기전을 준비 중이다. 오랫동안 문제가 풀리지 않더라도 시민들이 잊지 않도록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예정이다. 올해에는 해병대 2사단이 있는 김포 애기봉에서 출발해 대전 현충원과 예천 사고 지점을 거쳐 포항까지 가는 행군을 준비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에 1박2일 행군을 진행한다면, 약 2년만에 포항에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예비역 해병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의 폭도 넓힐 계획이다. 그는 “해병대의 모토는 ‘안 되면 될 때까지’다. 전시에 총알이 빗발치는 상륙작전에 투입되는 해병대는 무모한 도전이 그 근간에 깔려 있다. 이 사건이 올바르게 끝날 때까지 행군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동기들에게 연신 미안해하는 박정훈 대령에게 김태성 회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다소 오글거리고 촌스러울 수 있지만, 예비역 해병들을 움직인 것은 이런 마음일 수도 있다. “너만 해병이냐, 나도 해병이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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