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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군부는 운동권, 운동권은 시민 고문한 ‘프락치 전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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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의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특별보좌역이 연루된 이종권씨 고문치사 사건 당시 KBS 보도 화면. 이씨는 1997년 전남대 학생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운동권 세력들로부터 '프락치'로 몰려 쇠파이프 폭행과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당시 정 특보는 남총련 의장이자 조선대 총학생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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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봄’이 흥행가도를 달리는 가운데, 지난주 정치권에서는 이른바 ‘프락치’ 관련 이슈가 잇달아 터져나왔다.

14일 더불어민주당은 전남대 재학 당시 가짜 대학생을 프락치로 의심해 고문·폭행한 끝에 살해하는 데 가담, 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의찬 당대표 특별보좌역을 내년 총선 ‘공천 적격자’로 판정해 논란이 됐다. 바로 그날 한동훈 법무장관은 과거 정부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던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배상판결 항소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당은 논란이 일자 적격 판정을 뒤집었지만, 당사자가 반발하면서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군사 정부 시절 운동권 학생에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던 ‘국가 폭력’과, 그 대척점에서 벌어진 프락치 사냥 명분의 ‘운동권 폭력’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편집자주

12·12 군사반란으로 수립된 전두환 정권은 거센 반정부 학생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1982년 이른바 ‘녹화(綠化) 사업’을 시작했다.

‘녹화’는 “좌익으로 빨갛게 든 물을 빼고 학생들의 의식을 푸르게 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국군 보안사령부는 운동권 학생들을 ‘군 입대‘ 명분으로 강제로 끌고온 뒤 운동권 동료 정보를 밀고하는 ‘프락치’ 임무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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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대공처가 만든 ‘특수학변자(ASP) 심사 및 순화계획 보고’(1982. 11. 17.) 문건. 특수학적변동자는 “대학 재학생 중 내무부 장관이 결정한 소요관련자”라고 명시돼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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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 조사 후에는 곧바로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투입돼 학교서클 동향과 지하서클 연계조직을 파악해 보고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고 친구와 동료, 선후배를 배반하도록 강요하는...”

“대상자들은 이 기간 중 거의 매일 학교주변 식당과 주점 등에서 친구와 서클 선후배 등을 만나 각종 동향을 파악했고...”(진실화해위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 진실규명 결정’ 보도자료 中)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 자기가 ‘녹화사업 1기 대상자’였다고 말한다. 그는 한 칼럼에서 보안사의 녹화 사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너 하나쯤 죽어도 안전사고로 보고하면 그만이다’라는 협박 속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하며 녹화사업 대상이 된 사병들의 인간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물론 한 교수는 이후 북한 김일성을 ‘자수성가형 민족영웅’ ‘우리민족이 가장 암울한 상태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것을 성취한 지도자’ 등으로 표현해 논란을 빚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보안사가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면서 고문을 했다는 증언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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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시절 고문을 받고 프락치(신분을 속이고 활동하는 정보원) 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박만규 목사가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선고공판을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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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동훈 법무장관이 직접 사과의 뜻을 밝힌 ‘프락치 강요 사건’의 피해자 이종명·박만규 목사는 과거 인터뷰에서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으며 다음과 같은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통닭구이 상태(사지를 봉 하나에 묶은 상태)에서 물고문 ▲원산폭격 ▲다리에 곤봉 끼우고 밟기 ▲결박, 구타

운동권이 맞선 방법은 이른바 ‘프락치 사냥’이었다. 프락치로 의심되는 인물을 붙잡아 처절하게 응징했다. 국가 폭력을 비판하면서 그들 자신도 폭력으로 맞선 것이다.

무고한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넣은 일도 있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4년 9월 서울대 학생들이 학교 내에 있던 타 학교 학생 및 민간인 4명을 정보기관 프락치로 오인해 감금하고 물고문·폭행 등을 가한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각각 22시간에서 최대 6일 간 감금된 상태로 고문을 당했다.

서울대생을 부러워하는 방송대생, 공무원 시험 준비생, 재수생 등 4명이 피해자였고, 사건 이후 지금까지도 그 4명 가운데 실제 프락치로 확인된 이는 없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이 일로 징역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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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구속된 유시민씨.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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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전 이사장은 직접 피해자들을 폭행하진 않았지만 피해자 소지품을 뒤져 신분을 확인하는 등 색출 작업에 동참했다.

이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전기동씨는 2019년 김명일 현 조선NS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 내 군대시절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말했습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중략)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전두환을 미워하지 않았나요. 내가 전두환과 같은 전씨라고 심하게 폭행했습니다.”

보안사 대공처는 1984년 12월 ‘녹화공작’ 주무 부서였던 심사과를 공식적으로는 해체했다. 그러나 그 이름만 바꿔 ‘선도업무’라는 명칭으로 1987년까지 공작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지난해 보안사 문건을 통해 밝혀졌다.

민주항쟁 후 첫 직선제로 출범한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90년까지 보안사 정보처 주도로 ‘선도업무’라는 이름의 운동권 출신 장병 관리가 계속 이어졌다. 자신이 이런 ‘녹화·선도’ 작업에 투입됐었다는 사실을 진실화해위에 신고한 사람은 작년까지 15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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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1997년 6월 ‘이종권 고문 치사’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총련 산하 남총련 간부들이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때려 숨지게 한 이 사건에 가담한 정의찬 당시 남총련 의장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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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로, 보안사의 프락치 운용 기록은 더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운동권의 반(反)프락치 폭력은 이어졌다. 그것이 관성에 의한 것인지, 망상에 의한 것인지, 혹은 내부 단결 목적으로 지도부가 기획한 것이었는 알 수 없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정의찬 민주당 대표(이재명) 특별보좌역의 ‘이종권씨 치사 사건’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하나회를 척결한지 한참 지난 1997년 5월 벌어졌다.

광주·전남대학총학생회연합(남총련) 의장이었던 정 특보와 그 간부들이, 25세 이종권씨가 전남대 학생 행세를 했다는 이유로 쇠파이프 등으로 폭행하고 고문해 숨지게 만든 것이다. 당시 가해자들은 소주 12병을 나눠 마시고 만취 상태로 이종권씨를 향해 “경찰 프락치라고 자백하라”며 폭행했고, 이씨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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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완도·진도 지역구에 출마 준비 중인 정의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특보가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당 공직후보자검증위원회 재심 결정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과거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돼 유죄 판결을 받은 정 특보에 대해 기존 공천 적격 판정을 '부적격'으로 뒤집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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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특보는 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년에 자격 정지 3년,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심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고, 김대중 정부 당시 특별사면·복권됐다. 그 뒤 경기도지사 비서관과 이재명 대선 캠프 선대위 등 이재명 대표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전남 해남·완도·진도에서 총선 준비를 해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살인·치사 등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공천 부적격 판정을 내린다’는 총선 특별 당규에도, 지난 14일 총선 후보자 검증위원회 검증에서 그를 통과시켰다. 그랬다가, 논란이 일자 하루만에 “실수였다”며 판정을 뒤집었다.

정 특보는 “(재)검증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다. 정 특보는 15일 기자회견을 열어 “저는 폭행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폭행을 지시하지도 않았다”며 “사건 직후 광주전남지역 학생운동을 이끌던 책임자로서 양심에 따라 법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을 뿐이다. 당시 학생운동 문화가 그러했다”고 했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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