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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데스크 칼럼] 사람 좀 그만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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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안재만 조선비즈 증권부장, ‘지금 부자들은 배당주에 투자한다’ ‘포스트 코로나 경제 트렌드 2021(공저)’ 저자




SK스퀘어의 11번가 ‘손절’은 계약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SK는 계약에 따라 콜옵션(11번가 지분을 되살 수 있는 권리)을 포기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반발하는 것은 SK가 5년 전 투자 유치 당시에는 최악의 경우에도 마치 11번가 콜옵션을 행사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양측이 합의한 ‘콜앤드래그’는 회사가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투자자들 주도로 아예 경영권을 매각해 버리는 장치다. 조건에 따라 ‘사실상의 풋옵션(매도할 수 있는 권리)’으로 인식될 수 있다. 정황상 국민연금을 비롯한 11번가 투자자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은 들어줄 사람이 없다. 5년 전 11번가 투자 유치를 담당했던 SK 측 인사들이 회사를 떠났거나, 최소한 이번 딜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콜옵션을 해줄 것 같았어!”라고 해봐야 SK는 아예 대꾸하지 않는다.

협상 파트너가 전부 바뀌어 후속 협의 때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것, 금융투자업계를 들여다보면 비슷한 일이 꽤 많다. 일반 개인 투자자들도 비슷한 일을 많이 겪는다.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손실과 관련해 프라이빗뱅커(PB)한테 항의라도 해보려 오랜만에 지점을 찾았는데, 담당자가 싹 바뀌어 있더라는 글도 봤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최근 차환 작업을 진행했다. 차환 과정에서 금리가 연 3%대에서 9%대로 치솟았다고 한다. 너무 높아지는 것 아니냐고 묻자 “아, 몰라. 나 곧 인사 나”라고 답했다. 농담처럼 한 대답이지만, 현재의 금융권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현상은 민관이 마찬가지다. 외국 정부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정부와 일할 때 담당자가 너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럽다는 말을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어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민간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너무 자주 사람을 교체하는 것이 아닐까.

올해 연말 증권가에는 역대급 인사 광풍이 불고 있다. 대형 증권사 CEO가 잇따라 날아가고, 그 후폭풍으로 임원들도 자리를 바꾸고 있다. 요즘엔 통폐합돼 사라지는 부서도 많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회사를 떠나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올해 증권사들이 적지 않은 사고를 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을 교체한다고 해서 조직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회사는 뭔가 큰 결단을 내렸다고 포장하기 쉽지만, 사람 빼고는 아무것도 안 바뀌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잦은 교체는 역설적으로 책임감을 떨어뜨린다. 나도 곧 떠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성과급 챙기기 바쁜 것이다. 큰 그림은 그리지 않고, 단기 성과에 집착하게 만들 수 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금융 감독 당국이 금융권에 칼을 빼 들었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금융권 종사자들의 ‘소설 속에서만 등장할 것 같았던’ 해괴한 비리는 계속되고 있다. 사람만 바꾸는 것은 개혁이 아니다. 대표이사 교체로 분위기 쇄신이 될 때도 있겠지만 아예 망가뜨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앞의 사례로 언급한 SK는 부회장단을 포함한 대규모 인적 쇄신이 진행됐다. 아마도 11번가 투자자들은 또다시 협상 파트너가 바뀔 것이다. 다시 한번 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증권사들은 내년 중 골칫덩어리 해외 부동산 처리를 놓고 과감한 손절 작업을 전개할 것이다. 어차피 전임자의 판단 미스, 혹은 비리로 낙인 찍힌 물건들이니 시원하게 매각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러면 우리나라의 손해다. 실패한 딜을 주관한 사람이라도, 그 딜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손실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책임을 묻는 것은 그 다음에 하면 된다. 매각 작업도 투명하고 깔끔하게, 통제된 시스템 아래에서 잘 진행됐으면 한다.

안재만 기자(hoonpa@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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