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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3 (금)

“서러워 마라, 열 사람 살리고 죽으니 아버지는 혁명가다” [본헌터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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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공주농업중학교(공주농중, 5년제)에 다니던 시절의 상춘. 평생을 역도와 육상 등 운동으로 단련해 왔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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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상춘이여.



나이가 아흔둘이지. 그래도 지팡이 짚고 잘 걸어 다녀. 평생을 운동으로 다져온 몸이여. 내가 역도와 육상을 했거든. 공주에서 중학교 다닐 때 날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키도 175㎝로 젤 컸지. 오죽하면 공주의 한 사진관 사장이 나보고 몸 좋다면서 특별히 사진을 찍어줬겄어. 그 옷, 역도복은 아녀. 그냥 팬티 바람으로 누워서 폼 잡고 찍었지. 그래도 멋지지 않어?



5년제 공주농업중학교(공주농중)에 다녔어. 한 학년에 120명밖에 없는 명문이여. 고향은 아산이지. 영인면 알어? 영인국민학교 졸업했어. 중학교는 좀 쉬다가 만 16살에 들어갔어. 그때 옆구리에 권총 차고 다니던 배석장교이자 체육 선생이 충남에서 처음으로 역도기구를 사왔는데 내가 60㎏짜리를 세 번 꺾어서 단번에 들어버렸어. 그날로 역도선수가 되었지. 내가 150㎏까지 들어봤어.



철인10종 경기 선수도 했어. 충남 대표로 전국체전도 나갔는데 메달은 못 땄어. 마지막까지 뛰었으면 동메달이었어. 100m 달리기부터 해서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높이뛰기, 400m, 110m 허들, 원반던지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까지 아홉개를 다 마치고 마지막 1500m 뛰다가 포기했어.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느낌이잖어.



아녀, 마음이 땅 속으로 꺼지는 느낌이 더 무섭지. 공주농중 4학년 때 6·25 사변이 나고 내가 아버지를 잃었잖어. 존함이 수자 홍자(1902년생)여. 그해 추석날(9월26일) 아침에 아버지가 날 부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여. “너 조금도 서러워 마라. 열 사람 죽을 거 살리고 나 하나 죽는 게 현대의 혁명가다.” 국민학교도 안 댕긴 양반이여. 이 심오한 말은 도대체 뭐여. 이제부터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겨.



내 고향 아산 영인면 신운리2구는 하씨 집성촌이여. 46가구가 하씨였어. 16가구는 다른 성씨 쓰는 사람들이었지. 부촌이었어. 근데 부자들이 정이 없어. 사촌 땅 사면 배만 아픈겨. 돈만 알고 서로 트집만 잡지. 갈등이 심했어. 그러다가 육이오가 터진 거여.



인민군 세상이 된 뒤 아버지가 영인면 신운리 인민위원장을 했어. 종중 어른들이 아버지를 추대한 거여. 원만하게 일을 처리할 사람을 고른 거지. 아버지가 위원장 할 때 인민군이나 지방 좌익한테 죽은 사람이 없어. 딴 동네는 궐기대회 열어 지주들 막 죽이고 했잖여. 그러다가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고 9·28 수복이 됐어. 북으로 도주하는 인민군들이 우리 집에 머문 거여. 말하자면 인민군 패잔병 연락소가 우리 집이 된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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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아산시 영인면 신운리 자택에서.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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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이 악질지주 몇 명을 내놓으라고 한 거여. 아버지가 지주들 숨은 데 알지만 말을 안 했어. 그러니까 인민군이 아버지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간 거여. 어머니랑 나도 울면서 따라갔지. 인민군이 그러는 거여. 마을을 깨끗하게 해주겠다고 말이여. 말하자면, 악질지주들을 청소해주겠다는 거여. 소나무에 묶어놓고 위협해도 안 되니까 탕탕탕 총을 쐈어. 휴…하늘에 대고 쏜 거였어. 그렇게 끝까지 지주들 숨겨주고 보호해준 거여.



하지만 인민군이 물러난 다음에 경찰이 인민위원장 한 사람은 용서해주지를 않았어. 아버지는 잘못한 게 없으니 피신하지도 않았지. 음력 8월20일(10월1일) 온양경찰이 트럭 타고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갔잖어. 함께 끌려간 동네 사람들은 영인 지서에 내려줬지만 아버지와 또 다른 두 사람은 온양경찰서까지 갔지. 둘은 농민위원장하고 여맹위원장이여.



아버지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던 지주들이 말여. 인민군 떠난 뒤 부역자 잡겠다고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지주들 덕볼까 하는 사람들이 거기 빌붙어서 사람 죽이는 데 앞장섰지. 그네들이 손가락 총질만 하면 다 죽이는 거여. 정말 잘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적 감정으로 그런 거여. 집 짓는데 부잣집 앞까지 담 넓혔다는 이유로 죽이기도 했으니까. 신운리2구에서만 20명 넘게 죽었잖어.



어머니랑 나는 죽지는 않았지만, 대한청년단 창고에 끌려가 죽도록 두드려 맞았어. 어머니는 살이 닿으면 아프니까 이불을 모기장 마냥 치고 잤어. 그 지경으로 온몸이 멍들고 상처가 났어. 나도 새끼줄로 두 손이 묶인 채 끌려가서 몽둥이로 등짝을 50대 맞고 기절했어. 이북 출신 채씨 그놈이 그랬어.



끌려가서 보니 내 옆에 국민학교 선생님이 무릎꿇고 앉아있어. 공주농중 1년 선배 태훈이여. 선생님은 백석포 지서로 가고 나는 영인면 지서로 갔는데, 선생님은 지서로 가다가 방공호에서 총맞아 죽었대. 나는 그래도 집안 할아버지 진욱이 지서에 찾아와 항의해줘서 산거여. 그 지주들 말여, 다 이름을 알어. 가해자들 이름 다 외워.



집에 돌아와 뭘 먹었는지 알어? 변소 가서 똥을 눟고 그걸 퍼담아 설탕 넣어 마셨어. 어머니가 먼저 그렇게 마시고 나한테 알려준 거여. 매타작으로 생긴 독을 빼는 황금탕이라고 하면서 말이여.



그제서야 아버지 말이 이해가 갔어. 만약 아버지가 지주들 은신처를 알려줬으면 나중에 우리 가족들은 모조리 죽었을겨. 다섯 남매까지 아주 멸족을 했을거여. 아버지가 지주들만 살린 게 아니라 처자식도 살린겨. 아버지는 농사일만 아는 선비였어. 모습이 가물가물하지만 키가 작고 명주옷으로 된 저고리바지 입고 댕겼지. 밤에는 말이여, 동네 사랑방에서 동네 어르신들 모셔다놓고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했어.



내가 아버지한테 효도한 게 하나 있어. 공주농중 2학년 때 반장이 됐어. 아버지가 한 번은 학교를 왔는데 선생님들이 아들 잘 뒀다고 칭찬을 해준거여. 그러니까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은 꼭 학교를 와서 내가 체육시간에 앞에 나가 구령 외치고 하는 걸 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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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말이여. 아버지는 혁명가여. 여러 사람 살리고 혼자 죽은 현대의 혁명가여. 혁명가의 아들은 그 덕분에 지금 아흔 넘게 살고 있잖어.” 11월7일 자택에서.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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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쟁과 함께 아버지도 잃고 학교도 더 다니기 힘들게 되었지. 집에 있는데 공주농중 담임선생한테서 편지가 왔어. 이북 출신이라 어디 피난갈 데도 없었을 거여. 국어를 가르쳤는데 3년간 우리반 담임이었잖어. 난 3년간 반장을 했고 말여. 나더러 공주까지 좀 오라는 거여. 160리를 걸어서 갔어. 선생님이 나를 일주일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그러는 거여. 상춘아, 학교에 안 와도 좋으니까 시험만 보라고. 그러면 졸업시켜주겠다고 말이여. 정이 있었던 거여.



어머니는 아버지 잃고 나서 두부장사를 하면서 나보고 대학을 꼭 가라고 했어. 쌀 네 가마를 주면서 이거 팔아 등록금 내라는 거여. 전쟁 중에 신흥대학(현 경희대) 체육과 입학시험을 청주에서 봤어. 합격증 받고 나선 부산에 판잣집으로 세운 임시학교로 무작정 갔어. 체육과 교수님이 소사 집에서 자게 해주고, 또 나중에 총장 된 영식, 그분하고 지내게 해줬어. 돈은 없어도 다들 정이 있었어.



전쟁 끝나고선 서울 이문동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2학년 봄 고향집에 못자리하러 간 거여. 논에 볍씨 뿌리려고 말이여. 그런데 영인중학교라고 새로 생긴거여. 그런데 선생 없어 문닫게 생겼대. 그때 교장이 공주농중 1년 선배였어. 학교에 전기도 없을 때여. 발령 내도 누가 옵니까? 나보고 선생 좀 해달래. 월급을 3천원 주겠대. 그때 대학교 등록금이 4500원 할 때여. 그럼 많이 주는 거여. 내가 석달만 봐주겠다고 했어. 석달이면 9천원이잖어 1년 등록금 버는 거 아녀. 석달 간 봐드리겠다고 했다가 33년을 영인중학교에서 보냈어.



영인중학교, 온양고등학교에서 체육선생 하면서 역도부 창설해 역도선수 키웠어. 영인중학교 나온 종철이는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도 땄지. 아들은 육상선수 출신이여. 난 정으로 가르쳤어. 평생 정에 한이 맺혀서, 입만 열면 정 이야기를 해. 정이여 정.



참, 아버지는 어디에 묻혔냐고? 아까 세 사람만 온양경찰서로 갔다고 했잖어. 아버지 빼고 두 사람은 한 달만에 집에 돌아왔어. 농민위원장하고 여맹위원장 했던 사람들 말여. 근데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 지게 작대기로 때려죽여 버린 거여. 아버지는 그 전에 죽었어. 아버지를 태우고 간 경찰 트럭 몬 사람이 그랬어. 온양서 천안 가는 길가 산에서 죽였다고 했어. 거기서 젤 많이 죽었잖어. 거기가 성재산이래.



그래도 말이여. 아버지는 혁명가여. 여러 사람 살리고 혼자 죽은 현대의 혁명가여. 혁명가의 아들은 그 덕분에 지금 아흔 넘게 살고 있잖어. 이 나이에도 아버지가 애달파 눈물이 난다면 믿겠어?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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