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27 (토)

냉혈한이라 욕해도 외교는 현실일 뿐…냉전기 역사 빚은 키신저 별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00세로 별세… 미국 대통령 12명에 조언
역대 중국 지도자 전부 상대한 유일 미국인
중·러·베트남·중동에 족적… 한반도도 관심
한국일보

영국 런던 로열 알버트 홀을 나서며 언론에 손을 흔들고 있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2002년 4월 촬영된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회는 추측일 뿐이다. 오로지 위험만이 확실하다.”

미국의 가장 강력했던 국무장관으로 평가되는 헨리 키신저는 청년 시절부터 냉혹한 현실에 주목했다. ‘어떤 위험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로 자신을 묘사했다. 철저히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원칙이나 도덕이 설 자리는 그에게 없어 보였다. 50세에 미국 국무장관이 돼 냉전기 미국과 세계의 역사를 빚고 최근까지 영향력을 잃지 않은 ‘외교의 대명사’ 키신저가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국제 외교·정치 컨설팅 회사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는 29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존경받는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헨리 키신저가 11월 29일 코네티컷주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미국·중국 ‘핑퐁 외교’와 미국·소련 ‘데탕트’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사람은 키신저가 유일하다.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출범과 함께 국가안보보좌관을 맡은 뒤 1973년 9월 국무장관까지 함께 맡았고, 겸직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1974~1977) 때까지 지속됐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재임 시절 키신저는 대통령 외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외교정책 통제권을 행사했다”고 했다.

세계 냉전 질서는 키신저에 의해 재편됐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미국과 중국의 수교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1971년 두 차례 중국을 찾아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와 회담했고, 이는 이듬해 2월 닉슨 당시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및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23년간의 적대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에 나선 미국과 중국은 1979년 공식 수교했다. 양국 교류의 물꼬를 튼 사건이 1971년 미국 탁구팀이 중국에 가서 벌인 친선 게임인데, 이 ‘핑퐁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미중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00세 생일 두 달 뒤였던 올해 7월 100번째 중국을 방문한 그에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두 개의 100이 합쳐진 이번 중국 방문은 특수한 의미”라고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는 마오쩌둥부터 시진핑까지 모든 중국 지도자를 상대한 유일한 미국인이었다”고 전했다.

중국뿐만 아니었다. 냉전기 대척점에 있었던 옛 소련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는 더 빨리 이끌었다. 1969년부터 전략 핵무기 감축 협상을 주도해 1972년 협정에 이르게 한 것이 키신저였다. 베트남 전쟁 종식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73년 파리 평화조약 체결에 기여한 공로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를 정착시키는 과정도 그의 간여가 있었다.

냉전의 땅에는 늘 키신저가 있었고,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회담 구상을 내놨고, 1975년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4자 회담 개최를 공식 제안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실용적 냉혈한"...양면의 평가

한국일보

1973년 2월 헨리 키신저(왼쪽)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가운데는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키신저가 남긴 유산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NYT는 “키신저만큼 열렬한 칭송과 매도가 공존하는 외교관은 드물다”고 했다. 키신저는 극단적 현실주의자였다. 그에게는 국가 이익이나 세력 균형 관점이 전부였다. 스스로를 실용적으로 선택할 뿐이라 여겼지만, 인권을 완전히 외면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고 WP는 돌아봤다.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긴 파리 조약은 오랜 동맹인 남베트남 정부를 냉정하게 포기한 결과였다. 휴전 협상 중 하노이 폭격을 명령한 키신저에게 상을 줘서는 안 된다며 노벨평화상 심사위원 2명이 사퇴하기도 했다.

호전적인 면도 있었다. 1969년 동해 공해 상공을 날던 미군 정찰기가 북한 미그기의 공격으로 격추됐을 때도,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지역에서 벌목을 지휘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죽였을 때도 군사 보복을 주장하는 키신저를 당시 닉슨과 포드 대통령이 말렸다고 한다.

국무장관 퇴임 뒤에도 키신저는 저술·연구 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미국 외교 정책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NYT에 따르면, 존 F 케네디부터 조 바이든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 12명이 키신저에게 조언을 구했다.

키신저는 고령에도 최근까지 활력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회장을 지냈고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미국외교협회(CFR), 애틀랜틱카운슬 등 미국 싱크탱크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유대인인 키신저는 1923년 5월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태어나 15세가 된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954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생애에는 외교사에 대한 학자적 이해와 더불어 자기가 선택한 땅에서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독일계 유대인 난민의 집요함, 깊은 불안감이 혼재했다고 NYT는 분석했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