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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8 (수)

사진집 낸 한대수 “삶이 있기에 고통, 고통 있기에 삶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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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 ‘삶이라는 고통’ 낸 포크록의 대부

조선일보

최근 사진집을 낸 가수 한대수가 뉴욕 거리에 섰다. 그는 사진집에 각국 대도시의 노숙자, 1970년대 반전 시위자를 찍은 사진을 함께 실었다. “최근 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충격받았다. 아내 고향(러시아)이 얽힌 일이라, 우리 집도 의견이 갈려 냉전 상태가 됐다. 예전에 쓴 곡 ‘No Religion’(종교 반대)이 딱 맞는 시기랄까. 인간들이 정신을 잃은 것 같아 슬프다”고 했다. /George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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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한대수(75)가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을 냈다. 제목부터 그의 인생 축약판이다. ‘고통’은 한평생 한대수의 동반자였다. 태어난 직후 ‘아버지’란 존재가 사라져버린 고통, 화폐(돈) 부족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어야 했던 고통, 사회적 기준에 맞춰갈 수 없는 자신에 대한 고통….

뉴욕 퀸스에 사는 한대수를 최근 전화로 만났다. 그는 “사진집 영어 제목은 ‘I suffer therefore I am’이다. ‘고통받는다는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란 뜻”이라고 했다. 요즘 그의 삶은 외동딸 양호(16)를 학교에 보내고, 러시아 출신 아내 옥사나(53)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약속한 시각보다 7분 늦게 전화해 미안하다. 그 사이 세상이 끝날 수도 있는데”라면서 “딸이 날 닮아 학교 가길 싫어해 실랑이하느라고. 이 봐라. 인생은 고통이다”라며 웃었다.

사진집은 1960년대부터 2007년까지 전 세계를 돌며 직접 찍은 ‘필름 사진’과 삶에 대한 에세이들을 주제로 했다. 한대수가 1968년 TBC(동양방송) 쇼 프로그램 ‘명랑백화점’에서 걸걸한 목소리로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를 외치며 국내에 첫 반향을 일으켰던 시기와도 겹쳐 있다. 그가 “방종”이란 손가락질과 한국 최초 “포크록 대부의 탄생”이란 선망을 동시에 맞이한 때였다.

한대수는 그 시절 자신의 목소리가 “상처투성이, 역설적인(Ironical) 목소리였다”고 했다. 조부(한영교 박사)는 연세대 신학대 초대 학장,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인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미국 명문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지만 중퇴했다. “내가 사실 겁쟁이야. 인공수정, 해부하라는데 졸도할 뻔했어요.” 이후 사진에 매력을 느껴 뉴욕 사진 학교로 진학했지만, “반대한 조부가 모든 지원을 끊었다”고 했다. “방 7개짜리 맨해튼 대저택에서 불 켜면 바퀴벌레가 와다다다 사라지는 이스트빌리지 빈민굴로 가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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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가 청년 시절 직접 찍은 첫 아내 김명신 디자이너. /ⓒ한대수. 북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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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꼴을 보다 못한 외가 식구들이 한대수를 한국으로 데려왔고, 당시 TBC 최고 프로듀서였던 이백천이 쎄시봉에서 노래하던 그에게 반해 방송에 세웠다. 찡그린 얼굴을 직접 찍어 커버로 쓴 1집 ‘멀고 먼 길(1974)’의 수록곡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곧 ‘금지 가수 딱지’가 붙었다. “반항적인 음악”이란 이유였다. “장발에 나팔바지 차림이니 술 취한 아저씨들이 ‘너 여자냐 남자냐’며 시비 걸기 일쑤였죠. 어머니는 TV를 보고 창피하다고…. 결국 외가에서도 쫓겨났죠.” 특히 “화폐 부족의 고통이 질리도록 싫었다”고 했다. 그는 돈을 ‘화폐’라고 부른다. “화폐는 음악에게 물이에요. 자동차로 따지면 기름. 그래서 이 노래를 쓴 거지. 물~좀~주소~. 하하!”

그는 “내가 여유롭게 음악가 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전처도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사진집에서 ‘이혼 후 불행하게 지내던 전처를 한때 미국 길거리에서 재회했고, 현 부인의 배려로 집에 데려와 함께 잠시 돌봤다’고도 고백했다. “헤어지자 말한 이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래야 헤어짐을 고함 받은 사람도 그에게서 해방되거든. 그런데 그런 (전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그걸 옥사나(현 부인)가 러시아, 대지의 여자라 정말 마음이 넓어 품어 준거지.”

다만 한대수는 “고통 속에 환희의 9번 교향곡을 쓴 베토벤처럼 모든 예술은 고통에서 나온다”고 했다. 대표곡 ‘행복의 나라로’도 자신이 100일 지난 갓난아이 때 집을 떠난 아버지를 17세 때 미국에서 재회했지만 좀처럼 좁혀지지 않던 거리감, 소수 인종으로 겪던 고독감, 냉전 시대와 분단에 대한 고민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백인 여성과 재혼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죠. 당시 미국에서 아버지 회사 일을 도우며 롱아일랜드에서 맨해튼까지 1시간 동안 기차를 자주 탔는데, 창밖 하늘과 광야가 너무나 슬퍼 보였어요. ‘광야는 넓어요/하늘은 또 푸르러요/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듣는 사람 따라 우리의 희망 사항으로 여겼지만, 사실은 내가 가고 싶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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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가 청년 시절 직접 찍은 가수 송창식 사진. /ⓒ한대수. 북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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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5장의 음반을 냈지만 “나이 들수록 신곡이 뜸해진 것도 고통에 무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뿐만 아니라 폴 매카트니 등 75세 이상 로커들은 신곡이 별로 없어요. 새것에 자극을 받지 못하거든. 스물다섯까진 모든 게 새로워. 짜장면만 봐도 야, 세상에 이런 맛있는 게 다 있나. 고등학교 때 잠시 사귄 여자 친구 손만 잡아도 좋아 미치겠고, 기타로 옮기면 바로 곡이 된 거지.” 그럼에도 2020년에 낸 곡 ‘페인 페인 페인’에선 자신이 받은 격렬한 고통의 자극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첫 시작부터 “고통(Pain)”만 아홉 번을 외쳤다. “팬데믹 시기를 써 낸 블루(Blue·우울한) 록이었죠. 당시 뉴욕 수퍼마켓에 2시간씩 줄서며 빵 한 개, 버터 한 덩이, 고기 한 쪽 구하는 게 일과였어요. 무슨 페레스트로이카 때 모스크바에 사는 것도 아니고….”

한대수는 “고통을 겪으며 더 나아지려는 삶의 갈구 또한 생기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사람들이 그래요. 와 이래 괴롭노. 왜 하는 일마다 안 되나. 나도 지금 고통스러워요. 설거지를 3일 동안 안 해 그릇이 쌓여 있고, 일주일 뒤 미쳐 날뛰는 뉴욕 월세를 내야 하고…. 그럼에도 곳곳에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봄의 벚꽃이 예뻐 깔깔 웃고, 삼겹살에 소주 먹는 순간이 기쁘고. 가끔은 내 꿈에 여자 웃음 소리가 들어오는데 그게 또 날 좀 기쁘게 해요. 우리가 연애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지. 연애 추억의 대부분도 고통이긴 하지만. 으하하하!”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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