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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1 (금)

“빨갱이 자식”이라는 청천벽력…학살당한 아버지 [본헌터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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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환일. 엄마 뱃 속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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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환일이에요.



남자 이름 같죠? 어릴 적 집에서는 환옥이라고 불렀어요. 할아버지가 이름을 바꿔주셨대요. ‘옥’자가 안 좋다고 했어요. 제 이름 한 글자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도 저를 보석상자처럼 조심조심 취급해 주셨어요. 클 때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어요. 아무 것도 안 시켰으니까요. 어린애마냥 가만 두었어요. 제가 ‘유복녀’라서 그랬을까요?



충남 아산시 도고면 도산리 도산1구가 고향이에요. 도고산 바로 밑이죠. 예전에는 80여 가구가 모여 살았대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생일이 음력으로 1950년 10월17일이죠. 양력으로는 11월26일이네요. 엄마가 만삭이 되어 몸을 풀려고 공주의 친척집으로 가 있을 때 아버지가 저 세상 사람이 됐어요.



엄마는 얼마나 황망했을까요. 큰 아이가 고작 11살이고 젖먹이가 태어나려고 하는데, 7남매를 놔두고 남편이 떠났으니까요. 엄마는 늘 고달프고 슬픈 얼굴이었어요. 입술이 부르트고 피가 날 정도로 매일 일했어요. 논과 밭이 있었지만, 일을 할 사람은 없고, 일하는 사람을 쓰면 제멋대로 해서 속을 끓였어요. 아이들은 툭하면 아팠고, 그럴 때마다 병원이 있는 예산까지 업고 밤길을 걸어갔대요. 불운하게도 7남매 중 넷이 어린 시절에 병으로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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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일의 어머니 오순(1917~1996). 어머니의 얼굴에 신산했던 삶의 역사가 쓰여있는 듯 하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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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만으로는 안돼 지게에 나무와 수수엿을 이고, 지금은 사라진 선장역에 가서 팔기도 했어요. 저보다 11살 많은 언니 환선이 엄마랑 함께 고생을 했지요. 그 밑에 있는 언니들도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어요. 막내인 저만 빼고요. 엄마는 그렇게 힘겹게 살면서도 저한테는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하고 예뻐 만 해주셨어요. 아버지도 못 보고 태어난 막내가 불쌍했나 봐요. 밤에는 당신 가랑이에 제 발을 넣으라고 해서 안고 잤어요. 저는 묻지 못했어요. 언니·오빠들도 안 가르쳐주었죠. 아버지는 도대체 왜 없는지.



그 비밀을 깨우쳐준 사람은 뜻밖에도 시어머니였어요. 스물여섯 살 되던 1976년 늦가을에 결혼했어요. 화장품 팔러 다니는 분이 중신을 서 선을 보았죠.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남자가 약혼을 청하는 거예요. 착해는 보였지만 확신이 들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어요. 그 얘기를 엄마한테 했다가 혼났어요. “네가 뭐 잘났냐”고 했어요. 엄마는 혼기가 꽉 찬 딸이 시집 못 갈까 봐 애를 태워왔으니까요. 1년도 안 지나 결혼식을 했어요.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지요. 시어머니는 남편 먼저 보내고 농사일에 지쳐 계셨어요. 화를 낼 때가 많았죠. 며느리가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니 심통이 더 났을까요? 함께 산 지 서너달 된 어느 날 밤에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빨갱이 자식이라고. 아….



까무라칠 뻔했어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돌이 갓 지난 아이마저 놔두고 가출해 작은 엄마 집으로 달려갔을까요. 작은 엄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친정이 있는 온양읍 모종리(현 모종동)에 살고 있었죠.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어요. 그때서야 작은 엄마에게 오래된 가족사의 비밀을 들을 수 있었어요. 전쟁통에 우리 아버지 상직과 당신의 남편 형직이 빨갱이로 몰려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 작은 엄마는 “네 엄마 알면 쓰러지신다. 하룻밤만 자고 어서 돌아가라”고 달랬어요.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다음날 저녁 남편과 시어머니가 찾아왔어요. 시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빌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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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일(오른쪽)이 큰 언니 환선과 함께 한 모습.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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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상직은 5년제 예산농고를 졸업하고 온양읍 농조(농업조합)에 다녔대요. 지금으로 치면 농협이죠. 공부도, 직장생활도 다 잘해서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답니다. 그런데 전쟁 터지고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도고면사무소에서 사무를 본 게 문제가 됐나봐요. 큰 언니 환선은 “인민군이 왔을 때 엄청 머리 좋은 머슴 한 명이 주동이 되어 지주들을 혼냈는데, 그 머슴이 아버지한테 강압적으로 사무 일을 시켰다”고 해요. 밭에 가서 추수한 콩 알갱이 세는 일 따위를 했다죠. 또 좌익들이 연 궐기대회 후 지주들이 도고저수지에서 처형될 때 그곳에 있었나 봐요. 결국 면사무소 일을 함께 본 바로 밑의 동생 형직과 1950년 10월 말에 우익 자치대에 끌려간 거죠.



형직 밑으로는 동생 우직이 있었는데, 우직은 그보다 전인 10월 초에 끌려가 선장면 공동묘지에서 처형당했어요. 우직은 원래 도고면사무소에 일했어요. 인민군 점령기 때도 피신을 안 하고 일을 봐 밉보였다죠. 우직의 시신은 할아버지가 손수 수습했대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속 터져요. 동생 우직이 그렇게 당한 걸 알면서 왜 피신하지 않았을까요. 잘못한 거 없다고, 그냥 집에 남겠다고 했다가 화를 당한 거래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막냇삼촌 정이에요. 아버지는 6형제 중 둘째로 1920년생이죠. 막냇삼촌 정은 31년생이예요.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다니다 피난 내려와 있었어요. 형 둘이 동네에 있는 노루목고개 주막집에 감금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간 거예요. 감시자한테 허락을 받아 자초지종을 물었대요. 문을 열어놓고 아버지는 그저 통곡하면서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만 했대요. 형직 삼촌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글썽이더래요. 둘 다 등 뒤 손목에 삐삐선이 묶여있었고요. 막냇삼촌은 들고 간 내복도 전달할 수 없었어요. 눈물만 흘리다가 그냥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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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에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에서 재개된 유해발굴 작업. 위로 신도리코 옛 건물이 보인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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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냇삼촌이 이튿날 새벽 다시 주막집을 찾아갔을 때는 두 형이 자취를 감춘 뒤였어요.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지요. 나중에 그곳이 온양경찰서라는 걸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온양에 사는 누이동생들한테 들었는데, 온양경찰서에 끌려온 사람들이 죄다 인근 배방면 공수리에 있는 성재산 교통호에 가서 처형당했대요. 우리 고향 도산리에서만 그렇게 41명이 죽었어요.



언니 환선은 그때 11살이었는데 기억이 선하대요. 동네 먼 일가 사람들이 집에 쳐들어와 아버지 책상 서랍을 뒤져 죄다 가져가던 기억. 외삼촌과 어머니가 그 서랍 속의 물건들을 찾아오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니던 기억.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던 시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가끔 화가 나면 그 말을 했어요. 저는 또 가출을 하지는 않았어요. 더 험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고인이 된 오빠 환진은 철도공사에 들어갔는데 정규직이 안돼 애를 먹었어요. 국방부에서 일한 조카도 뭔가 불편한 일이 많았대요. 연좌제 때문이죠. 여기에 비하면 시어머니 말은 별 게 아닐까요? 아니죠. 그래도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어린 시절 늘 기가 죽어 있었고 어두웠지만, 그나마 엄마가 계셔서 숨을 쉬고 살았어요. 아버지 죽고 그렇게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도 부지런하게 일하며 자식들 키워준 우리 엄마. 엄마 욕되지 않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아버지의 진실을 안 뒤에도 엄마한테는 입도 벙긋 못했어요. 그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가 한숨만 쉬었으니까요.



저는 2년 전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아버지의 죽음을 진실규명해달라고 신청했어요. 아버지는 무고하게, 재판 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처형당했어요. 국가가 잘못했다는 결정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막냇삼촌 정이 진실화해위 조사관에게 증언을 해주었어요. 저에게 ‘증언서’도 써주었고요. 막냇삼촌은 92세, 지금은 기력이 없어 누워만 계세요.



참 이상하죠. 한 번도 얼굴을 못 봤지만,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목이 메어요. 아버지! 저는 그래도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마지막 소망은 진실규명과 함께 아버지 당신의 유해를 찾는 거예요. 성재산, 신도리코 건물이 있는 그곳 교통호에서 지금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죠. 며칠 전에 저는 검사원 앞에서 입을 벌려 DNA 시료 채취도 했어요. 유해를 찾으면 도고면 화천리에 있는 엄마 산소에 합장해 드릴 겁니다. 아버지 가묘도 만들어놨어요. 희망이 있을까요? 성재산 교통호에서 유해발굴은 잘 되고 있나요?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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