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카드 윤세운 코치 인터뷰>
아들 윤이준, 오사카 고교 배구부 진학
“일본 이시카와 같은 선수 되고 싶다”
오사카 고교팀만 150곳··· 1~3부 리그
아들 "인프라 탄탄… 배구 너무 재밌어”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일본 모모야마고교 배구부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윤이준(17) . 부친 윤세운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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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일본 가서 배구 하고 싶어.”
중학교 2학년 아들이 꺼낸 얘기에 아버지는 당황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아들은 학교 배구부에서 주전으로 뛰는 유망주였다. 평소에도 일본 남자배구 대표팀 주장 이시카와 유키(28)를 좋아했던 아들은 일본의 ‘빠른 배구'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너무 진지했다. 남자 프로배구 구단에서 코치로 일하는 아버지는 배구 인맥을 총동원해 일본 고교 진학이 가능한지 알아봤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일본 학생과 동일하게 고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아들은 일본어를 이제 막 배우는 단계였다. 코로나19가 심각할 때라 일본 입국조차 쉽지 않았다.
아들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중3 때 배구부 훈련이 오후 7시에 끝나면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일본어를 공부했다. 때마침 일본 오사카의 한 고교에서 입학이 가능하다는 답도 왔다. 배구 실기, 고교 입학시험 등으로 수차례 일본을 오간 아버지도 마음을 바꿨다. 일본 배구의 저변은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들은 올해 3월 일본 오사카 모모야마고교에 입학해 ‘롤모델’ 이시카와의 등번호 14번을 유니폼에 새긴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아버지는 혈혈단신으로 배구 유학을 떠난 아들을 먼발치에서 응원하고 있다. 우리카드 윤세운(44) 코치와 윤이준(17)군 부자(父子) 이야기다.
현직 프로 코치도 놀란 日배구 인프라
일본 모모야마고교 배구부 학생들이 학교 체육관에서 훈련하고 있다. 윤세운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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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군은 한국에서 미래가 탄탄한 배구 유망주였다. 배구 명문인 안양 연현중 재학 시절 이미 여러 고교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세계적인 아웃사이드 히터(레프트) 이시카와를 배출한 일본에서 배구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야 이시카와 같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자가 확인한 일본 배구 인프라는 ‘넘사벽’이었다. 한국의 남자 고교 배구팀은 23곳(334명). 일부 시·도를 제외하면 지역 예선 없이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에 나갈 수 있다. 반면 일본에는 고교 배구팀만 2,500여 개, 선수는 4만~5만 명에 달했다. 오사카에만 157개의 고교팀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잘하는 팀만 전국체전 격인 ‘일본전국고교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에 나갈 수 있다. 모모야마고는 오사카 8강 수준이다.
아들의 일본행(行)을 걱정했던 윤 코치도 일본 고교 배구를 접하고 마음을 바꿨다. 배구 선수에게 일본은 천국과 같았다. 매주 주말마다 크고 작은 대회가 쉬지 않고 열렸다. 오사카 고교 배구팀끼리 1부, 2부, 3부로 나눠 대결하는 지역 대회인 ‘긴키’ 대회가 대표적이다. 전국대회 격인 ‘하루코(춘계고교배구대회)’ 또는 인터하이에 나가지 못하는 팀도 언제든지 경기를 할 수 있다.
일본 모모야마고교 배구부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윤이준(17)군이 개인 훈련을 하고 있다 . 부친 윤세운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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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경쟁에서 탈락한 선수들도 뛸 기회가 많았다. 모모야마고 배구부원은 28명. 감독은 선수를 수준별로 1부, 2부, 3부로 나눈 뒤 다른 학교 1~3부와 수시로 연습게임을 치렀다. 최소 엔트리(12명)도 채우지 못하는 팀이 많은 우리나라에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윤 코치는 “고교 리그인데도 2부리그 우승팀이 1부리그로 승격하고, 1부 꼴등이 2부로 내려오는 승급제까지 있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일본에선 이렇게 팀이든 선수든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이시카와 같은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일본 배구 대표팀이 7월 세계 배구 최강자를 가리는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아시아 국가 최초 동메달을 따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에는 배구 엘리트가 없다
일본 남자 배구 대표팀 주장 이시카와 유키. 본인 인스타그램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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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치열하지만 역설적으로 모모야마고 선수와 지도자들은 배구를 즐겼다. 물론 훈련량은 만만치 않다. 부원 모두 오후 6시 30분까지 팀 훈련, 이후 오후 9시까지는 개인 훈련을 했다. 윤 코치는 이들 모두 우리나라처럼 프로를 목표로 운동하는 선수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이준군처럼 프로가 목표인 학생과, 순수하게 배구가 좋아서 운동하는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성적보다는 운동을 통한 ‘인성 함양’을 중요시하는 지도자들은 실력이 최상급인 선수도 다른 부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 청소, 점수기록 등을 번갈아 가면서 맡도록 했다.
이는 입시 경쟁이 치열한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한양대나 성균관대 같은 명문대 배구부에 가려면 ‘전국대회 8강 이상’ 같은 성적과 출전 시간이 필요하다. 지도자도, 선수도, 학부모도 이겨서 성적을 만드는 게 최우선이다. 당연히 지도자들은 에이스급 선수를 중심으로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다. 주전으로 뛰지 못한 선수와 그 학부모는 속이 타 들어간다. 윤 코치는 “일본은 잘하든 못하든 선수들이 배구를 재미있게 했다”며 “주전으로 못 나간 선수들이 목 놓아 응원하는 모습도 놀라웠다. 일본 배구 만화 ‘하이큐!!’는 결코 과장된 내용이 아니었다”고 했다.
일본에선 엘리트와 취미반의 구분이 없기에, 운동부에 대한 특혜도 없었다. 배구부원 모두 정규 수업을 100% 다 들어야 했다. 해당 학년 국·영∙수 등 11개 과목 전체 평균이 40점 이하면 자동 유급됐다. 일본어가 서툰 유학생 이준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학기 중간고사 때 시험 성적이 다소 좋지 않았던 그에게 배구부 감독은 기말 고사부터 과목별로 동급생 과외를 붙여줬다. 시험 며칠 전에는 학교 체육관에 배구부 1학년 학생을 모두 모아놓고 단체 학습을 시켰다. 이준군은 중간고사 때보다 성적이 껑충 뛰었다. 일본은 ‘선수 이전에 학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유럽 진출을 꿈꾸는 열일곱 배구 선수
일본 모모야마고교 전경. 윤세운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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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자리를 잡은 지 1년. 이준군은 많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중학교 때 배구할 때는 운동 끝나고 집에 오면 방에 누워 유튜브만 보던 아이였다.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와 아빠에게 각종 배구 영상을 보낸다. 이 선수처럼 배구를 잘하고 싶다는 표현인 셈이다. 이준군의 시선은 이미 해외로 향하고 있다. 일본 대학에 진학한 뒤 유럽 리그에 진출하는 게 목표다. 현재 일본 남자 대표팀 주전 멤버들은 대부분 세계 최고 리그인 이탈리아와 폴란드 리그에서 뛰거나, 뛴 경험이 있는 해외파다.
윤 코치는 “아내와 종종 웃으면서 ‘아들이 일본 가더니 배구에 미쳐버렸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며 “일본에 간 뒤 ‘배구가 재미있다’고 하니 부모 입장에서도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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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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