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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보수 티파티 운동의 서막을 연 "배관공 조(Joe the Pl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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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워젤바커(Samuel J. Wurzelbacher, 1973.12.3~2023.8.27)
한국일보

배관공 조 새뮤얼 워젤바커는 2008년 대선 기간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와 길거리 논쟁을 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노동자의 상징이자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는 오바마의 '부자 증세' 와 '부의 분배' 공약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회주의적 공약이라며 비판했고, 공화당과 보수 언론은 그를 '진정성 있는 보수의 대변인'으로 집중 조명했다. 2016년 3월 로이터와 인터뷰하는 워젤바커.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그는 테이블 한 켠에 루거 권총을 놓아 두었다고 한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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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대 미국 대선 후보 마지막 TV토론을 앞둔 2008년 10월 12일,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경합주인 오하이오주 유세에 나섰다. 20세기 이래 오하이오에서 지고도 대선에서 승리한 예가 단 한 번(존 F. 케네디) 뿐이어서, ‘오하이오가 가면 미국이 간다(As Ohio goes, so goes the nation)’는 말까지 생겨난 미국 대선 풍향계 같은 곳. 오바마는 유세 일정이 없던 시간을 활용, 대표적인 러스트벨트 지역인 디트로이트(미시건) 건너 항구도시 털리도(Toledo)의 서민지역(Holland)을 돌며 유권자들을 만났다.
마침 집 앞마당에서 10대 아들과 럭비공을 주고받으며 놀던 34세 배관공 새뮤얼 워젤바커(Samuel J. Wurzelbacher)가 군중을 헤집고 오바마에게 다가갔다. 그는 “15년 경력의 배관기술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당신은 아메리칸 드림을 믿느냐”고 물었다. 오바마가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되물었다. “나는 연수익 25만~28만 달러쯤 되는 회사를 인수할 계획이다. 당신의 새로운 세금 공약에 따르면 나는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그게 맞나?”

훗날 ‘오바마케어’로 구체화하는 의료개혁 등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연수익 25만달러(인플레 감안 2023년 기준 약 35만5,000달러) 이상 개인사업자의 세율을 인상한다는 게 오바마의 공약 중 하나였다.

워젤바커의 저 질문은 2007년 불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와중이던 그해 대선의 핵심 쟁점이기도 했다. 금융회사 등의 잇단 파산으로 인한 금리 인상과 불황- 실업 사태로 하위 중산층 가구의 경제적 지위가 빠르게 추락하던 때였고, 금융경색으로 인한 세계금융위기도 확산되던 중이었다. 미국 정부가 생명보험회사 AIG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방침을 발표(9월 16일)한 직후였고, 부실 금융-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정부가 조장한다는 비판과 “(기업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세금으로) 사회화한다”는 푸념이 각계에서 터져 나오던 무렵이었다.

오바마는 소상공인 세금 감면과 의료공제 혜택 등을 설명한 뒤 “경제가 바닥서부터 좋아져야 모두에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배관업자라면 공사를 맡길 여유가 있는 고객이 많아지면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너무 어렵다.(…) 부를 나누어 확산하는(spread the wealth around)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워젤바커가 ‘아메리칸 드림’을 먼저 언급한 까닭은 “내가 누구를 도울지 말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다. 내가 돈을 많이 벌었으니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고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니다”란 말을 하려던 거였다. 오바마는 자신의 대답을 떨떠름해 하는 워젤바커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성공했다고 벌주려는 게 아니다. 당신보다 뒤쳐진 이들에게도 성공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약 5분여간, 이례적으로 길게 이어진 둘의 공방은 TV 뉴스 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소개됐고, 워젤바커는 일약 유명해졌다.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 진영과 보수 언론은 그를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성실한 노동자’의 상징이자 진보정치(인)의 횡포에 대담하게 맞서 개인의 (경제적)자유를 옹호한 보수의 아이콘으로 떠받들었다. ‘리벳공 로시(Rossie the Ribetter)’이래 미국 정치가 낳은 가장 강력한 인격적 메타포인 ‘배관공 조(Joe the Plumber)’ 신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무명 노동자에서 백인 저학력 노동자 중심 풀뿌리 보수의 “진정성 있는 대변자”로 급부상하며 미국 정치 양극화의 거센 물살을 탔던, 어쩌면 휩쓸렸던, 새뮤얼 워젤바커가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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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2일 오하이오 주 털리도의 한 거리에서 오바마 당시 대선 후보와 대화하는 워젤바커(오른쪽). 워젤바커는 한 인터뷰에서 오바마의 사상은 비(非)미국적이었지만, 그는 정직한 정치인이긴 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우리에게 솔직히 밝혔다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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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로 마무리된 둘의 길거리 논쟁 사흘 뒤인 10월 15일 뉴욕 홉스트라(Hofstra)대에서 열린 대선후보 최종토론에서도 그는 뜨거운 화두였다. 90여 분 토론 중 ‘배관공 조’는, 주로 매케인에 의해 25차례나 호명되며, 모기지사태와 관련된 ‘경제(16차례)’란 단어를 능가했다. 이라크 사태(안보, 외교)는 단 한 번 거론됐고 아프가니스탄 이슈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매케인은 “당신(오바마)의 증세 공약은, 배관공 조나 그와 같은 수백만 명의 시민이 각자의노력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좌절케 하는 계획”이라고 주장했고, 오바마는 “내가 하려는 건 배관공과 간호사, 소방관, 교사, 자본이 부족한 젊은 기업인들에게 오히려 세금을 감면해주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 중 하나가 부자 증세”라고 반박했다. 진행자는 생방송 토론 도중 워젤바커의 집으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부재중이었던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세에서도 매케인은 오바마의 ‘부의 분산’ 공약을 사회주의 이념에 빗대며 “(오바마는) 국가를 통해 ‘배관공 조’의 돈을 가져다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려 한다”고 집요하게 공격했고, 오바마는 “(매케인은) ‘배관공 조’에 대해 즐겨 언급하지만 그는 배관공 조가 아니라 ‘헤지펀드 매니저 조’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반격했다.

공적인 공간에서 그가 호명될 때마다 보수 언론들은 그가 누구에게 투표하려 하는지 묻곤 했다. 토론 다음날인 16일, 그는 집 앞에 몰려온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비밀투표 아닌가. 나는 유권자들이 각자 원하는 바대로 투표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당일 CBS 이브닝뉴스 인터뷰에서는 “만일 오바마가 언젠가 (25만 달러가 아니라) 연 소득 10만 달러를 고율 증세 기준으로 정하면 어찌 되는 거냐?(…) 끝은 어디냐? (…) 우리는 지금 미끄러운 경사면에 서 있다”고 말했고, Fox뉴스에서는 “오바마의 대답을 듣고 더 무서워졌다.(…) 그의 공약은 다분히 사회주의적이다”라고도 했다.

진보 언론은 ‘배관공 조’ 흠집내기에 나섰다. 그가 배관공협회가 인정하는 자격증 보유자가 아니라 배관공 보조일 뿐이며 2007년 소득세(1,182달러)를 미납해 주 세무당국으로부터 부동산 유치권 결정까지 받은 ‘불성실 시민’이란 사실도 폭로했다. 다만 주 정부 관계자는 유치권 결정은 당사자에게 통보되지 않은 형식적 절차여서 그도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고 밝혔다. 워젤바커는 저 사실이 보도된 직후 밀린 세금을 완납했다. 그 과정에서 오하이오주 직업가족서비스부(ODJFS) 담당 국장이 직원을 시켜 그의 사생활 정보를 언론에 유출한 사실이 밝혀져 그해 말 사직해야 했다.

뉴욕타임스는 중소기업청 2007년 집계, 유급 직원을 둔 미국의 소상공인은 600만 명 미만이며 그 중 오바마 증세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납세자는 70만 명도 안 된다고, 그나마도 다수는 전통적 의미의 소상공인이 아니라 변호사나 회계사 부동산 투자자 등이라고 보도했다. 한 마디로 ‘배관공 조와 같은 수백만 명’이란 매케인의 주장은 과장됐다는 의미였다. CNN은 노동부 통계국 2007년 자료를 인용, 배관공 평균 연봉은 4만7,350달러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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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공화당 행사장에서 참석자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배관공 조'. 미국 정치평론가들은 그의 등장을 오바마 집권기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보수정치운동 '티파티'의 신호탄이었다고 평가한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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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관공 조를 둘러싼 저 일련의 논쟁이 오바마 집권 1년차였던 2008년 본격화한 보수 유권자 정치 운동 ‘티파티(TEA Party)’의 촉매가 된 건 분명했다. ‘TEA’는 ‘Taxed Enough Already(세금은 이미 충분히 내고 있다)’의 약자다.

워젤바커는 2008년 말 한 홍보회사와 계약을 맺고 전국 티파티 모임 등의 연사로 초청받곤 했고, 재향군인회 등과 함께 부상 제대군인 구호 활동을 거들었다. 방송 디지털화 홍보 모델로 TV광고에도 등장했고, 2009년 1월엔 한 우파 온라인방송(PJ Media) 특파원으로 약 열흘간 이스라엘 가자지구 분쟁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앞서 2008년 11월 한 작가(Thomas Tabback)의 도움을 받아 자서전(‘Joe the Plumber: Fight for the American Dream’)도 냈다. 그렇게 그는 미국 우파의 ‘얼굴’이 됐다.

백인 저학력 노동자 계층에 대한 공화당의 구애는 1960년대 이른바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을 기점으로 본격화했다. 남부 전략이란 흑인 인권 신장에 따른 남부 백인 사회의 불안과 불만을 적극 대변하고 연방 정부에 맞서 각 주의 자율적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민주당 표밭이던 남부의 표심을 빼앗겠다는 구상. 그 전략의 위력은 68년 닉슨의 당선으로 입증됐다. 70년 5월 뉴욕 ‘안전모 폭동(hard-hat riot)’, 즉 성조기를 든 400여 명의 건설노동자들이 뉴욕 맨해튼에서 반전 시위 중이던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경찰관 7명을 포함해 1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그 폭동으로 체포된 건설노동자는 단 한 명뿐이었고, 닉슨은 건설노조 지도부를 백악관에 초청해 그들의 애국심을 오히려 치하했다. 대공황과 뉴딜정책 이래 서민 노동자 정당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민주당에겐 ‘건방진 대학생과 화이트칼라의 정당’이란 이미지가 얹혔다. 1955년 출범 이래 모든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던 미국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AFL-CIO)는 72년 대선에서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닉슨의 재선을 도왔다.

그런 공화당에게 ‘배관공 조’는 값진 정치적 자산이었다. 그는 공화당 지도부와 지역 조직의 적극적인 권유로 2012년 오하이오주 9선거구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CNN 카메라 앞에 자신의 굳은살 박힌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각종 청구서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25년간 쉬지 않고 일한 노동자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납세자들의 등에 올라타 우리를 짓누르며 살아왔다.” 그해 5월 조 바이든 당시 부통령이 지지유세 도중 공화당 대선 후보 미트 롬니(Mitt Romney)의 사모펀드(Bain Capital) 탈세 스캔들 연루 의혹을 들추며 “대통령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라며 “그는 대통령이 되기에는 배관공보다 자격이 부족하다.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배관공들 중에는 끔찍하게 똑똑한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하원 후보 워젤바커는 그 농담을 노동자에 대한 오만과 무례의 단적인 예라고 비판했다. “배관공과 목수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두 번 재고 단번에 잘라라(measure twice and cut once)’란 말이 있다.(…) 나는 장인들이 지금 워싱턴에 있는 하버드나 예일 졸업생들보다 이 나라를 훨씬 잘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이론에 기반하고 있지만 우리는 실용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국민은 진정한 리더십을 원하지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선거구는 민주당 아성이었고 그는 현역 민주당 의원에게 참패했지만, 공화당은 오히려 득을 본 선거였을 것이다.

선거 후 ‘배관공 조’라는 추상-집합명사는 간간히 들렸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정치 무대에서 점차 잊혀갔다.

오하이오주 토박이인 워젤바커는 공군 베테랑 아버지와 웨이트리스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공군에서 배관 특기병으로 복무한 뒤 96년 제대, 한 회사에서 배관공 보조로 일했다. 오바마와 만나던 당시 그는 스스로 밝힌 바 “25만달러 근처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받으며, 이혼한 첫 아내와 낳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었다. ‘연 수익 25만~28만 달러 사업체’란 당시 그의 직장 얘기였고, 냉정히 말하자면 일종의 판타지였다. “내 집과 개, 엽총 두 자루와 배스 낚시용 보트”를 아메리칸 드림으로 정의했다는 그는 2011년 재혼한 아내(Katie Schanen)와 낳은 1남2녀까지 17살 터울의 4남매를 부양하느라, 그의 말처럼 “건축 현장 인부로, 벌목공으로, 배관공으로” 쉴 새 없이 일했다. 2014년에는 크라이슬러 지프 공장에서 약 석 달간 일하며, 그가 한사코 싫어했던 오바마를 공개 지지한 ‘자동차노조’에도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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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노동자의 고통과 “배부른 정치인”들의 횡포에 분노하는, 무명 컨트리 뮤지션 올리버 앤서니(Oliver Anthoney)의 노래 ‘Rich Man North of Richmond’가 최근 화제가 되면서 트럼프 지지자들과 우파 정치인들은 ‘제2의 배관공 조’ 신화로 그의 노래를 끌어들였다. 앤서니는 자기 노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 노래가 마치 자신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하는 보수 정치인들을 보면 화가 난다. 내가 노래를 만든 게 바로 그들 때문이다.” 지난 8월 공화당 대선후보 토론회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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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서전과 2008 대선 후 인터뷰 등에서 구제금융에 동의한 매케인도 썩 마음에 드는 후보는 아닌 ‘차악’이었다며, 제도권 정당과 정치인 일반에 대한 불신감을 표출하곤 했다. 그는 “당에 반항적인 후보”여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2016년 로이터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승자이고 갑부다.(…)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같은 성공을 백악관에서도 이뤄내리라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고 말했다.

말년까지 그는 개인 웹사이트(JoeforAmerica.com) 등을 통해 정치 이슈에 대한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거대한 이슈가 되면서 시민들이 진심을 드러내는 걸 꺼리게 됐다. 그들은 인종주의자나 동성애혐오주의자라는 비난을 두려워한다”고 쓰기도 했다. 그는 “내게도 게이 친구가 있지만 그들이 내 아이들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총기 옹호론자였고, 이민반대론자였다.

2023년 1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를 위해 지역 언론과 주민들은 모금행사를 벌였다.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 거 아니냐. 평소보다 좀 힘든 시절을 맞이했지만그래도 괜찮다. 아직 살아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배관공 조’의 마지막 소원은 “내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아내와 아이들이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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