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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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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 울린 11살 소년 시인…암투병 엄마 떠난뒤 아빠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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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1일 개봉 다큐 '약속'

민병훈 감독·시인 시우 부자

암투병 엄마 여의고 시인 된 아들

초2 때부터 쓴 동시집 펴내

중앙일보

다큐멘터리 영화 '약속'은 민병훈 감독이 암으로 엄마와 작별하게 된 아들 시우와 자신이 제주에서 보낸 치유의 시간을 담았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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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졸업식 직전 엄마를 여읜 민시우(11)군. 2016년 엄마가 폐암 선고를 받은 뒤 정착한 제주도 애월 숲속 집에 영화감독인 아빠 민병훈(54)씨와 단둘만 남게 됐다. 첫 두 해는 밤마다 눈물바다였다. 아빠 품에 안겨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던 소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를 쓰는 시인이 됐다. 마음에 맺힌 눈물을 말하는 짧은 글이 시가 됐다.

“비는 매일 운다/나도 슬플 때는 얼굴에서 비가 내린다/그러면 비도 슬퍼서 눈물이 내리는 걸까?”

시우군이 쓴 첫 시 ‘슬픈 비’다.

“바람은 엄마의 노래/안개는 엄마의 숨소리”(‘엄마 눈동자’, 이하 시 제목) “엄마가 나에게 다가오는 바다”(‘사랑의 바다’)….

마당의 대나무, 이따금 찾아오는 노루, 때 이른 첫눈까지, 엄마가 사랑한 자연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마음이 애틋한 사모곡(思母曲)을 빚어냈다.



엄마 그리운 제주 초등생 시, 유재석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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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군이 처음 쓴 시 '슬픈 비'를 아빠와 함께 읽는 모습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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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 성탄 선물처럼 펴낸 민시우 동시집 『약속』(가쎄)의 부제는 ‘언젠가 만날 수 있어!’. 올 1월 KBS 휴먼 다큐 ‘자연의 철학자들’에 이어 8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시 쓰는 제주 소년으로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약속’)는 엄마 약속을 되새기며 “제가 죽을 때/봄이었으면 좋겠”다고, “벚꽃을 손에 들고/엄마한테 선물을 주고 싶기 때문”(‘네 번째 일기’)이라는 어린이 시인 앞에 MC 유재석‧조세호도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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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군이 엄마가 생전 좋아했던 제주의 숲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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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 뛰는 것, 걷는 것,/안아주는 것, 먹는 것, (중략) 이런 게 모두 다 기적이야.”(‘기적’) “생명은 끝이 있지만/희망은 끝이 없어”(‘영원과 하루’)….

시를 쓸수록 깊어지는 아들의 일상을 아버지 민 감독은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에서 찍은 전작 ‘기적’(2020)의 각본을 맡기도 한 아내 안은미 작가의 생전 모습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을 살아 숨 쉬는 듯 신비로운 제주의 자연 풍광에 새긴 장면들과 함께다.



영화감독 아빠와 엄마 잠든 나무 마주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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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군은 “엄마가 돌아가신 것 자체가 엄청 슬펐는데, ‘약속’이란 시를 쓸 때 아빠가 ‘엄마가 너한테 언젠가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생각으로 시를 쓰면서 밝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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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약속’이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이 시를 쓰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아빠와 함께 엄마의 수목장 나무를 처음 찾아가는 1년 뒤까지 3년간을 주로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민 감독은 한국 주류 영화계의 상업 문법을 거부하고 고뇌하는 인간군상을 깊은 통찰로 그려왔다. 대일외고, 모스크바 러시아 국립영화대를 졸업하고 타지키스탄 시골 교사의 분투를 그린 데뷔작 ‘벌이 날다’로 이탈리아 토리노영화제 대상, 그리스 테살로키니영화제 은상을 받으며 작가주의 감독으로 주목받아 왔다. 도박 빚을 안고 우즈베키스탄에 낙향한 바이올린 연주자(‘괜찮아, 울지마’), 사랑 앞에 흔들리는 신학도(‘포도나무를 베어라’), 알코올 중독과 불신으로 삶이 무너진 사격선수 부부(‘터치’), 학업 문제로 고통받는 10대(‘사랑이 이긴다’), 영감이 멈춘 중국 현대미술 거장(‘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 등 삶에 대한 질문을 스크린에 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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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민병훈 감독은 아내가 생각나 슬픔에 잠길 때면 숲으로 간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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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제주 숲으로 쓴 애도 일기



민 감독은 2015년 한국 영화산업 독과점 구조에 반발해 상업영화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약속'은 2016년 실험영화 ‘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 이후 오랜만에 영화제가 아닌 극장 개봉으로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시우가 시를 썼다면 저는 (아내를 향한) 애도 일기를 카메라로 눌러 쓰듯 촬영했죠.”

지난 17일 아들과 시사회에 함께 나타난 민 감독이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전한 말이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생인 시우군은 아빠와 똑 닮은 장발, 축구와 눈썰매‧다이빙을 즐겨 가무잡잡하게 탄 모습이었다. 시우군은 “우리 일상이 영화로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 장난인 줄 알았는데 신기했다. 너무 흥행해서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긴장되고 재밌기도 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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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짙은 날 제주 숲에서 어미 말과 아기 말을 만난 모습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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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군에게 시는 "일기같이 편한 것, 제 인생을 바꾼 것"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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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감독은 극영화를 주로 찍다 자신의 가족을 처음 드러낸 감정을 “오묘하다”고 표현했다. “잊지 않으려고 쓴 시, 편지로 아이에게 다시 엄마 모습을 목도하고 공감하게 해주려는 게 처음 취지였다”며 “아이와 나의 슬픔, 비극을 애도하고 마주 보는 이야기, 어떻게 삶이 전진하는지의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이야기 같았다. 누구나 죽음을 목도하고 슬픔과 상처를 겪는다. 이 영화가 그런 분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는 희망적인 치유,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마지막 편집 때 그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아이와 영화를 찍으면서 몸으로 대화하는 법을 알았어요. 안아주고 만져주고 다독여주고…. 그전에도 그렇게 했지만, 아이의 소리를 듣고 손 내밀어주고 잡는 그런 대화의 중요성을 영화로 더 느꼈죠.”

옆에서 시우군이 "아빠는 남을 잘 생각해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분”이라 귀띔했다. 마주 보는 부자의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Q : -아빠가 영화감독인 줄은 알았나.

민시우="취미로 찍는 사진가라 생각했다. 옛날부터 자연을 많이 찍었다."

Q : -시는 어떻게 쓰게 됐나.

민시우=“학교에서 시를 배운 날 선생님이 잘 쓴다며 집에서 써보라고 하셨다. 집에 오자마자 시를 써보려고 하는데 비가 많이 왔다. 눈물이 떠올라서 ‘슬픈 비’를 써서 아빠한테 보여드렸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다가 며칠 뒤 재능 있다고 해주셨다.”

Q : -아들의 시를 처음 본 감상은.

민병훈=“‘으응?’ 했다(웃음). 초등학교 2학년생 치고는 감정 표현이나 내용에 깊이가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가 쓰면 잘 들어주고 잘 대화하고 공감해주는 것이었다. 엄마를 그리며 많이 울고 기도한 게 시로 태어나면서 은유 표현 기법을 스스로 안 것 같다.”

Q : -책을 많이 읽나.

민시우=“책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읽어야 할 땐 읽는다.”

민병훈=“동시보다 허수경‧나태주‧허연 시집을 권했다.”

민시우=“가장 좋아하는 책은 아빠가 맨 처음 보여준 『그림약국』(※플라톤·헤르만 헤세 등의 명언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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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약속'에는 민병훈 감독, 아들 민시우 시인과 함께 세상을 떠난 안은미 작가의 존재감이 짙게 드러난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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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시가 뭐라고 느끼나.

민시우=“일기같이 편하게 글을 이어가는 것, 살짝 내 인생을 바꾼 것.”

Q : -시를 쓴지 3년째인데, 축구도 좋아한다고. 장래 희망은?

민시우=“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공감하고,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약속’의 마지막 부분은 부자의 일상을 되감기를 하듯 편집했다. 그렇게 거꾸로 흐른 시간이 영화 첫 장면 생전 엄마와 시우가 산책하던 날에 이른다. 시우군이 “엄마가 저를 품에 안고 ‘시우야 사랑해’ 하고 말하는 장면, 아빠와 카드게임 하는 웃긴 장면”과 함께 가장 좋아한다고 꼽은 장면이다. 민 감독은 “이 영화의 모든 것,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은 시우의 소원을 들어준 장면”이라 설명했다. “첫 장면과 엔딩이 교체되듯이, 시우를 다시 아이로 되돌려주고 싶은 시선이 이 영화의 지향점”이라며 “우리 모두 어른이 돼서 죽으면 아이로 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들 천국을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다시 태어날 때로, 순수한 시절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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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감독은 “저에게 제주는 아픔과 기록의 장소. 많은 숲에서 온전히 홀로서기할 수 있는 (독립 제작 방식의) 새로운 형태에 눈떴다”며 덧붙였다. “태풍이 불면 바다에 가는데 처음엔 신발이 안 젖으려고 펄쩍 뛰었어요. 그러다 이게 뭐하는거지, 싶어 자연스럽게 발을 담근거죠. 세례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바다에 발을 아껴야 하는가. 왜 눈‧비 안 맞으려고 우산을 썼지, 싶은거예요. 태풍을 맞으면 되고 바다에 들어가면 되는데요. 몸이 변하면서 의식이 변화했죠. 제주에서 새로운 영화 세계에 눈 떴습니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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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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