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일 개봉 다큐 '약속'
민병훈 감독·시인 시우 부자
암투병 엄마 여의고 시인 된 아들
초2 때부터 쓴 동시집 펴내
다큐멘터리 영화 '약속'은 민병훈 감독이 암으로 엄마와 작별하게 된 아들 시우와 자신이 제주에서 보낸 치유의 시간을 담았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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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졸업식 직전 엄마를 여읜 민시우(11)군. 2016년 엄마가 폐암 선고를 받은 뒤 정착한 제주도 애월 숲속 집에 영화감독인 아빠 민병훈(54)씨와 단둘만 남게 됐다. 첫 두 해는 밤마다 눈물바다였다. 아빠 품에 안겨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던 소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를 쓰는 시인이 됐다. 마음에 맺힌 눈물을 말하는 짧은 글이 시가 됐다.
“비는 매일 운다/나도 슬플 때는 얼굴에서 비가 내린다/그러면 비도 슬퍼서 눈물이 내리는 걸까?”
시우군이 쓴 첫 시 ‘슬픈 비’다.
“바람은 엄마의 노래/안개는 엄마의 숨소리”(‘엄마 눈동자’, 이하 시 제목) “엄마가 나에게 다가오는 바다”(‘사랑의 바다’)….
마당의 대나무, 이따금 찾아오는 노루, 때 이른 첫눈까지, 엄마가 사랑한 자연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마음이 애틋한 사모곡(思母曲)을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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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리운 제주 초등생 시, 유재석 울렸다
시우군이 처음 쓴 시 '슬픈 비'를 아빠와 함께 읽는 모습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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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 성탄 선물처럼 펴낸 민시우 동시집 『약속』(가쎄)의 부제는 ‘언젠가 만날 수 있어!’. 올 1월 KBS 휴먼 다큐 ‘자연의 철학자들’에 이어 8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시 쓰는 제주 소년으로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약속’)는 엄마 약속을 되새기며 “제가 죽을 때/봄이었으면 좋겠”다고, “벚꽃을 손에 들고/엄마한테 선물을 주고 싶기 때문”(‘네 번째 일기’)이라는 어린이 시인 앞에 MC 유재석‧조세호도 눈시울을 붉혔다.
시우군이 엄마가 생전 좋아했던 제주의 숲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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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는 것, 뛰는 것, 걷는 것,/안아주는 것, 먹는 것, (중략) 이런 게 모두 다 기적이야.”(‘기적’) “생명은 끝이 있지만/희망은 끝이 없어”(‘영원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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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아빠와 엄마 잠든 나무 마주한 3년
시우군은 “엄마가 돌아가신 것 자체가 엄청 슬펐는데, ‘약속’이란 시를 쓸 때 아빠가 ‘엄마가 너한테 언젠가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그런 생각으로 시를 쓰면서 밝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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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약속’이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아들이 시를 쓰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아빠와 함께 엄마의 수목장 나무를 처음 찾아가는 1년 뒤까지 3년간을 주로 담은 작품이다. 영화는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영화에서 민병훈 감독은 아내가 생각나 슬픔에 잠길 때면 숲으로 간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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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제주 숲으로 쓴 애도 일기
“자연 속에서 시우가 시를 썼다면 저는 (아내를 향한) 애도 일기를 카메라로 눌러 쓰듯 촬영했죠.”
지난 17일 아들과 시사회에 함께 나타난 민 감독이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전한 말이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생인 시우군은 아빠와 똑 닮은 장발, 축구와 눈썰매‧다이빙을 즐겨 가무잡잡하게 탄 모습이었다. 시우군은 “우리 일상이 영화로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이 장난인 줄 알았는데 신기했다. 너무 흥행해서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긴장되고 재밌기도 하다”며 눈을 반짝였다.
안개 짙은 날 제주 숲에서 어미 말과 아기 말을 만난 모습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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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군에게 시는 "일기같이 편한 것, 제 인생을 바꾼 것"이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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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감독은 극영화를 주로 찍다 자신의 가족을 처음 드러낸 감정을 “오묘하다”고 표현했다. “잊지 않으려고 쓴 시, 편지로 아이에게 다시 엄마 모습을 목도하고 공감하게 해주려는 게 처음 취지였다”며 “아이와 나의 슬픔, 비극을 애도하고 마주 보는 이야기, 어떻게 삶이 전진하는지의 이야기이고 그렇다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이야기 같았다. 누구나 죽음을 목도하고 슬픔과 상처를 겪는다. 이 영화가 그런 분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는 희망적인 치유,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마지막 편집 때 그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옆에서 시우군이 "아빠는 남을 잘 생각해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분”이라 귀띔했다. 마주 보는 부자의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Q : -아빠가 영화감독인 줄은 알았나.
민시우="취미로 찍는 사진가라 생각했다. 옛날부터 자연을 많이 찍었다."
Q : -시는 어떻게 쓰게 됐나.
민시우=“학교에서 시를 배운 날 선생님이 잘 쓴다며 집에서 써보라고 하셨다. 집에 오자마자 시를 써보려고 하는데 비가 많이 왔다. 눈물이 떠올라서 ‘슬픈 비’를 써서 아빠한테 보여드렸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다가 며칠 뒤 재능 있다고 해주셨다.”
Q : -아들의 시를 처음 본 감상은.
민병훈=“‘으응?’ 했다(웃음). 초등학교 2학년생 치고는 감정 표현이나 내용에 깊이가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가 쓰면 잘 들어주고 잘 대화하고 공감해주는 것이었다. 엄마를 그리며 많이 울고 기도한 게 시로 태어나면서 은유 표현 기법을 스스로 안 것 같다.”
Q : -책을 많이 읽나.
민시우=“책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읽어야 할 땐 읽는다.”
민병훈=“동시보다 허수경‧나태주‧허연 시집을 권했다.”
민시우=“가장 좋아하는 책은 아빠가 맨 처음 보여준 『그림약국』(※플라톤·헤르만 헤세 등의 명언을 엮은 에세이집)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약속'에는 민병훈 감독, 아들 민시우 시인과 함께 세상을 떠난 안은미 작가의 존재감이 짙게 드러난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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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시가 뭐라고 느끼나.
민시우=“일기같이 편하게 글을 이어가는 것, 살짝 내 인생을 바꾼 것.”
Q : -시를 쓴지 3년째인데, 축구도 좋아한다고. 장래 희망은?
민시우=“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공감하고,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약속’의 마지막 부분은 부자의 일상을 되감기를 하듯 편집했다. 그렇게 거꾸로 흐른 시간이 영화 첫 장면 생전 엄마와 시우가 산책하던 날에 이른다. 시우군이 “엄마가 저를 품에 안고 ‘시우야 사랑해’ 하고 말하는 장면, 아빠와 카드게임 하는 웃긴 장면”과 함께 가장 좋아한다고 꼽은 장면이다. 민 감독은 “이 영화의 모든 것,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은 시우의 소원을 들어준 장면”이라 설명했다. “첫 장면과 엔딩이 교체되듯이, 시우를 다시 아이로 되돌려주고 싶은 시선이 이 영화의 지향점”이라며 “우리 모두 어른이 돼서 죽으면 아이로 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들 천국을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다시 태어날 때로, 순수한 시절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민병훈 감독은 “저에게 제주는 아픔과 기록의 장소. 많은 숲에서 온전히 홀로서기할 수 있는 (독립 제작 방식의) 새로운 형태에 눈떴다”며 덧붙였다. “태풍이 불면 바다에 가는데 처음엔 신발이 안 젖으려고 펄쩍 뛰었어요. 그러다 이게 뭐하는거지, 싶어 자연스럽게 발을 담근거죠. 세례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바다에 발을 아껴야 하는가. 왜 눈‧비 안 맞으려고 우산을 썼지, 싶은거예요. 태풍을 맞으면 되고 바다에 들어가면 되는데요. 몸이 변하면서 의식이 변화했죠. 제주에서 새로운 영화 세계에 눈 떴습니다.” 사진 엠라인디스트리뷰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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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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